[Review] 토슈즈를 신은 심청 - 유니버설 발레단 공연 심청

발끝에서 피어나는 한국의 고전
글 입력 2023.05.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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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미 박사인 최재천 교수님의 유튜브를 종종 즐겨 보는데, 그 중 ‘효’에 접근하는 생물학자의 관점이 참 흥미롭다.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효도’란 어떤 기준에서 생각해봐도 손해보는 일밖에는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영장류 중에서도 인간만큼 부모를 보살피는 존재는 없으며, 어쩌면 인간만이 하고 있는, 호모 사피엔스만이 하고 있는 독특한 행동이 바로 부모와 선조를 향한 섬김이라고 한다. 특히나 유교적 관점에서 열녀비, 효자문을 세웠던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권 나라에선 그러한 문화가 더더욱 두드러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무언가를 강조한다는 건 그렇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까? 보편적으로 많은 문화권에서 우상숭배를 강조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효는 문화적으로 형성된 인간의 행동일 수 있지 않을까?


한국 사람에게 ‘효’에 관한 인물을 물을 때 열이면 열 모두 효녀 심청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 없을 것이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읜 딸을 젖동냥하여 지극정성으로 키운 아버지 심봉사, 그리고 눈이 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할 공양미 삼백석을 위해 인당수에 빠져 죽을 제물로 자신을 바친 딸 심청이.


심청전은 춘향전, 장화홍련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몇 남아있지 않은 정확한 판본을 가진 판소리계 소설이다. 국한문본을 포함한 여러 이본이 있으며, 아직까지 판소리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몇 안되는 생명력 있는 이야기 중 하나이다. 여러 이본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전래되고 구전되어 내려오며 사람들에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은 심청전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야기였는지를 보여준다. 


국문학 전공 수업 시간에 판소리계 소설인 심청전의 국문본 원본을 읽어볼 일이 있었다. 사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국문학 작품, 과거 조선을 담고 있는 작품엔 꼭 몇 군데 불편한 부분이 짚이곤 한다. 심청전 또한 전체적인 플롯 자체가 그러하다. 현대적인 수많은 해석엔 심청이를 지나친 가부장적 효에 희생된 존재로 보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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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난 오히려 원문을 읽은 후 생각이 바뀐 케이스다. 심청전 원문 속 심청과 심봉사, 마을 사람들, 그리고 모든 등장인물들은 정말 생생하게 살아있다. 심청이 아버지인 심봉사에게 공양미 삼백석에 자신을 팔았다고 털어놓는 장면에서, 심청이의 대사가 얼마나 절절하고 슬픈지 모른다. 심청이 단번에 인당수에 빠지겠다고 결심했던 건 아니다.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결정을 하기까지 고민하고, 갈등하며, 끝까지 두려워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극히 인간적인 순간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더더욱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을 느끼게 한다. 


울고 웃으며 때론 애통함에 땅을 치는, 삶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원문을 읽다 보면 심청이도 심봉사도 그저 작품 속 어떤 캐릭터가 아닌 하나의 인물이자 사람으로 다가온다. 지극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또 지극히 딸을 사랑하는, 그렇게 목숨과 바꿀 정도로 가족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을 울리고 감동시키는 진심을 이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 


그 와중에 중간중간 장면들은 참 유쾌하고 재미도 있다. 줄거리를 알고 있음에도 배경이며 이야기며 참 언제나 읽어도 이야기적으로 즐겁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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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은 이러한 심청전의 매력과 가치를 아름답고 훌륭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4년 만에 우리에 곁으로 돌아온 유니버설 발레단의 ‘심청’은 그 의미부터 뜻깊다. 

‘심청’은 1984년 발레단 창단부터 세계부대를 염두에 두고 글로벌 제작진이 투입되어 기획된 초대형 창작발레 프로젝트의 작품 중 하나이다. 때문에 한국을 깊이 이해하는 다양한 국적의 예술진이 제작에 참여했는데, 유니버설 발레단의 초대 예술감독으로 발레의 불모지였던 80년대 한국에 정통 클래식 발레를 알리고자 혼신을 다한 애드리언 델라스 안무가, 그리고 그 뒤를 이은 로이 토비아스, 올레그 비노그라도프, 유병헌 예술감독이 그러하다. 


작곡가 케빈 바버 픽카드 역시 한국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미국의 음악가로, 그가 서민의 소박한 정서와 궁중의 우아한 전통을 음악에 녹여내기 위해 한국 역사와 예술을 연구했던 노력은 오케스트라의 아름답고 장대한 선율 곳곳에 녹아 있다. 이번 무대는 한복이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한 복식이라는 것을 새롭게 깨닫게 된 무대이기도 했는데, 의상 디자인을 맡았던 실비아 탈슨 디자이너 역시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를 두어 동서양 문화에 대한 이해가 남다른 인물이었다. 


1986년 국립극장 초연 이후 전미 3대 오페라 극장(워싱턴 케네디센터, 뉴욕 링컨센터, LA 뮤직센터), 프랑스 파리, 러시아 모스크바를 포함하여 세계 15개국 40여개 도시에서 찬사를 받은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무대이다. 서양에 다소 생소할 수 있는 효 사상을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화려한 무대 세트, 다채로운 의상, 수준 높은 테크닉에 담아 발레의 성공적인 역수출 사례로 만든 역사적인 무대이기도 하다. 이러한 공로로 2017년 제3회 예술의전당 예술대상에서 ‘대상’과 ‘최우수상’을 동시에 석권하기도 한 정말 대단한 무대이기도 하다. 


공연 내내 아름답고 우아한 발레의 몸짓과 그곳에 녹아있는 지극히 한국적인 아름다움에 눈을 뗄 수 없었다. 무대 바로 아래에서 연주되는 오케스트라의 장엄하고 아름다운 선율 또한 무대를 아름답게 꽉 채웠다. 대사 하나 없이 아름다운 몸짓으로, 그리고 아름다운 선율만으로 이렇게 사람들에게 이야기와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놀라고 감동했던 것 같다. 특히나 한복 복식이 색감도, 나풀거리는 모습도, 옷매무새도 참 조화롭고 영롱했는데 아름다운 발레의 동작들을 더욱 돋보이게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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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1장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은 심청은 아버지 심봉사에 의해 키워진다.

효심이 깊은 심청은 눈먼 아버지를 봉양한다. 

어느 날 심봉사가 개울에 빠지고 스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다. 

심봉사는 공양미 삼백 석을 부처님께 사주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말을 믿고 시주를 약속한다. 이를 알게 된 심청은 청나라 선원들이 제물로 쓸 소녀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마음에 선원들을 따라 배에 오른다. 

 

 

막이 오르고 심청전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태어나 어미를 잃은 심청이를 심봉사는 동냥을 해가며 어렵게,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심봉사의 손을 잡고 종종거리며 등장했던 어린 심청 배우들이 너무 귀여웠다. 어느새 훌쩍 아름다운 소녀로 자라난 심청 배우의 몸짓이 솜털같이 가볍고 아름다워서 감탄했던 것 같다. 


삼삼오오 모여 등장했던 마을 사람들의 복식의 색감과 옷매무새가 참 조화롭고 아름다워서 또 감탄했다. 한복이란 정말 아름다운 복식이구나, 라는 것을 심청 공연 내내 마음 가득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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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2장 선상

 

막이 오르면 선원들이 항해를 하고 있다. 선장과 선원들의 강렬한 군무가 이어진다. 

심청은 갑판에서 잠이 들고, 꿈속에서 만난 아버지는 심청을 위로한다. 

인당수에 이르자 갑자기 바다가 거칠어지고 폭풍우가 몰려온다. 

선원들은 바다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제물을 바친다. 

심청은 아버지의 눈이 뜨이기를 기원하며 인당수에 몸을 던진다. 

사납던 바다가 잔잔해지며 막이 내린다.

 


사나운 바다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영상으로 투사된 휘몰아치는 폭풍우와 번뜩이는 번개들이 인상적이었다. 선원들의 칼군무, 몰아치는 비바람과 폭풍우, 고조되는 음악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심청이 끝내 인당수에 빠지는 장면이었는데, 원작 이야기 속에서도 하이라이트 부분인 한 장면을 극적으로 정말 잘 살렸다. 휘날리는 심청이의 치마가 바람에 나부끼는 가녀린 손수건 한 장 같았다. 그리고 뛰어드는 순간엔 나도 모르게 숨을 참고 집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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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3장 용궁


화려한 용궁에서는 심청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심청이 도착하자 용왕은 그녀를 반갑게 맞히가고 함께 춤을 춘다. 

진주, 인어, 물고기들의 디베르티스망이 이어진다. 

용왕은 심청에게 용궁에 남아 같이 살기를 청한다.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심청은 육지로 보내줄 것을 간청한다. 

효심에 감동한 용왕이 그녀를 연꽃에 태워 육지로 올려보낸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무대의 스케일과 복장에 감탄했던 장면이다. 마치 환상 속 용궁을 그대로 그려 놓은 듯 했다. 특히 바다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짝을 지어 나와 저마다의 춤을 출 때가 참 유쾌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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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 왕궁


어전에서는 왕비 간택을 위해 여러 규수들이 소개된다. 그때 바다에서 건져 올린 연꽃이 왕에게 진상된다. 연꽃에서 나온 심청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이에 감동한 왕은 심청을 왕비로 맞이하고, 심청의 아버지를 찾기 위해 맹인 잔치를 열 것을 지시한다. 달 밝은 밤 왕과 심청이 사랑의 춤을 춘다. 

방방곡곡에서 맹인들이 왕궁에 모여든다. 잔치가 끝날 무렵 남루한 옷차림을 한 맹인이 들어오자 심청은 한눈에 아버지를 알아보고 얼싸안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심청이 왕비가 되어 나타나자 놀란 심봉사가 눈을 번쩍 뜬다. 잔치에 온 맹인들도 눈을 뜨고, 모든 사람들의 기쁨 속에 막이 내린다. 



2막이 시작되고 커튼이 걷히자마자 이곳저곳에서 감탄이 튀어나왔는데, 이는 너무나도 정갈한 왕실의 배경과 영롱하게 반짝이는 한복 때문이었다. 정갈하게 열을 맞춰 움직이는 모든 동작들이 너무 아름답고 멋졌다. 특히 왕이 등장할 때 검은색 왕의 복식이 정말 멋있었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심청과 왕의 로맨틱한 2인무, 문라이트 파르되도 정말 아름다웠다. 드라마틱한 안무와 황홀한 선율로 섬세하고도 낭만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새소리와 풀벌레소리 들리는 고궁, 시원한 밤공기, 그리고 그 안에서 느껴지는 한국적인 낭만과 미를 지극히 느낄 수 있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에 심봉사를 발견하고 버선발로 달려나가 매달리는 심청이의 장면에선,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뭉클한 감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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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알차고 아름다운 공연이었다. 발레란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구나,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란 이렇게 멋진 것이구나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정옥희 춤 비평가의 감상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시간이 흐르고 '심청'은 살아남았다.

8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적 발레 중에서 지금껏 정기적으로 공연되는 작품은 ‘심청’ 뿐 이다.

한 번 공연되고 사라지는 무수한 창작 발레 속에서 '심청'의 존재감은 도드라진다.

심청은 반질반질하게 닦으며 대물림해 온 가구처럼 손때 탄 기품이 있다.


- 정옥희 춤 비평가

 


[박주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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