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안의 화원을 여는 방법 – 뮤지컬 ‘비밀의 화원’

비밀의 화원으로 가는 열쇠를 찾는 법
글 입력 2023.03.25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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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에이미.jpg

 

 

내가 어릴 적에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책방에서 명작 동화를 무더기로 사서 아이들에게 선물하곤 했는데, 내 책장 한 구석에도 그러한 경위로 숱한 동화 책들이 한 자리씩 차지 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손이 많이 가던 책이 ‘비밀의 화원’이었다. 나만의 아지트 같은 공간을 바라던 어린 시절, 외로웠던 소녀 메리가 숨겨져 있던 화원을 찾아 가꾸며 친구를 만들어 가는 이야기는 너무나 황홀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뮤지컬 [비밀의 화원]이 막을 올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오랜만에 책장 속에서 그 책을 꺼내 보았다. 이제는 낡을 대로 낡고, 곳곳에 생활의 흔적이 묻어 있는 소설을 다시 읽으며 왜 나는 그토록 소설 속 메리의 이야기를 좋아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보육원의 아이들처럼 나 또한 사실상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해 보이는 화원 가꾸기를 어떻게든 해내는 메리 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비밀의 화원]은 원작 소설 속 메리, 디콘, 콜린, 마사의 이야기를 성 안토니오 보육원에서 자란 4명의 아이들 에이미, 비글, 찰리, 데보라가 연기하는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보육원에서는 반년에 한번, 아이들을 입양 희망자에게 공개하는 '오픈데이'가 열리는데 곧 나이가 차서 보육원을 떠나게 될 아이들의 마지막 오픈데이날, 에이미의 제안으로 이들은 소설 속 배역을 하나씩 맡아 연기하는 '비밀 연극'을 하게 된다. 


원작 소설 속 이야기를 그대로 가지고 오지 않고 이러한 액자식 구성을 선택한 점이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공연을 다 보고 나니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극중극 형식을 통해 잘 전달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메리의 이야기를 하는 보육원 아이들의 관계와 상황에 몰입하다보면 비단 그것이 소설 속 이야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건내는 위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공연 내용 중 인상 깊었던 장면들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독특한 극 구성과 특징을 가진 이번 공연의 형식적인 측면에 대한 나의 생각 또한 다루어 보고자 한다.

 

 

 

혼자 서는 법을 배워갈 나이


 

 

 

밖에 나가 풀 냄새를 맡아 보아요

바람이랑 달리기를 해도 좋구요

두 다리가 사라질듯 빨리 달리면 

숨이 차오르고 막힌 가슴 뻥 뚫릴걸요

혼자서도 노는 법을 배워갈 나이

햇빛아래 혼자 크는 나무들처럼

황무지를 쏘다니며 하늘을 보고 

어린 조랑말을 친구 삼는 아이들처럼

 

- 혼자 서는 법 中

 


가장 내 마음에 와닿았던 넘버 [혼자 서는 법]의 가사처럼, 보육원의 아이들은 마지막 오픈 데이를 앞두고 이제는 넷이 아닌 홀로 세상에 서야할 날을 앞두고 있었다. 세상은 아이들이 자신은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천천히 찾아갈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자신의 속 마음을 감추고 똑똑하고 도와줄 필요가 있지만 말 잘듣는 아이를 연기해야 했다. 


소설 속 메리 레녹스도 그랬다. 부모의 철저한 무관심, 자신을 그저 '아가씨' 취급하며 복종하는 하인들 아래에서 자란 메리는 제멋대로에 신경질적인 아이로 자랐지만, 부모님을 잃고 고모부인 크레이븐 백작의 집에 맡겨진 이후 아무런 준비 과정도 없이 '혼자'서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그래서 메리는 처음 마사가 자신의 옷과 신발을 입혀주지 않고 '이정도는 혼자 해보세요'라고 하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메리에게 마사는 [혼자 서는 법]을 가르쳐 준다. 황무지 위로 펼쳐진 자연을 벗삼고 지내는 그 지역 아이들처럼, 따듯한 옷을 입고 나가 뛰어놀다 보면 친구가 생길 것이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다보면 기대되는 내일이 찾아 올거라고. 이 얼마나 단순하고도 명확한 방법인가? 사실 보육원 아이들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나를 포함한 관객들도 이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혹 이 당연하고도 중요한 원리를 잊고 사는 것 같다. 당장 눈 앞에 놓인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마주하고 있다 보면, 세상이라는 커다란 바다 위에 갈길을 잃은 돛단배처럼 막막해지고, 당장 어떤 길이든 찾아내서 노를 젓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조난 당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럴때면 비밀의 화원을 찾는 메리처럼, 비밀연극을 하는 보육원 아이들처럼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을 찾아 조금쯤 스스로를 돌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메리가 건강하고 명랑한 아이로 바뀐 것처럼, 보육원 아이들이 조금쯤 솔직해지고 희망을 갖게 된 것처럼 세상이라는 바다 위 항해를 여행처럼 즐기는 날이 올 수 있지 않을까?

 

 

 

서로에게 울새가 되어주던 아이들


 

 

 

얼마나 좋을까 내가 찾은 낡은 열쇠 

비밀스런 문을 열수만 있다면

날 따라와 비밀을 알려줄게 너에게만 

내게 귀 기울여 너라면 내 비밀을 찾을거야

혼자인 너와 혼자인 내가 함께 나눌 수 있는 비밀

 

- 울새와의 하루 中

 

 

메리는 한 순간에 혼자가 되었지만, 첫 친구이자 자신을 비밀의 화원으로 이끌어준 울새를 만나면서 따분하고 막막하기만 했던 일상에서 재미를 찾아간다. 마사의 동생 디콘의 도움으로 화원을 가꾸며 건강하고 명랑해진 메리는 그 어떤 의지도 상실한 채 집에서 울며 지내던 콜린을 세상 밖으로 이끌어주게 된다.


혼자 였던 이들이 서로를 의지하며 성장해가는 소설 속 내용처럼, 뮤지컬 [비밀의 화원]에 등장하는 4명의 아이들 역시 비밀 연극을 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마지막 오픈데이를 앞두고 실망과 절망 뿐이던 이전의 오픈 데이들과 다를 바 없다며 쌀쌀 맞게 굴던 찰리는 결국 비밀 연극 속에서 콜린을 연기하며 세상이 자기를 선택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를 보여주겠다고 한다. 


에이미와 데보라 역시 소설 속 메리, 마사가 되어 보는 것만으로 당장 자신의 미래가 밝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비밀 연극을 통해 그동안 보육원 아이들과 쌓아온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고, 그 추억을 잊지 않고 간직한다면 어떤 힘든 일이 닥쳐와도 견뎌낼 수 있을 것이라고, 서로에게 그 믿음이 되어주자고 한다. 


동물을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한 디콘을 연기한 비글은 자신이 원하는 것, 하고자 하는 바를 비밀 연극을 통해 깨달은 듯 했고, ‘나는 무엇이 되고 싶어요, 어떤 것에 자신이 있어요’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어려워했던 이전과 달리 일하고 싶은 곳을 직접 찾아가 자신을 조수로 받아달라는 당찬 포부를 내보일 수 있게 되었다. 

 

 

 

책을 펼쳐, 비밀 연극을 하자


 

 

책을 펼쳐 간단하잖아

상상력을 펼쳐 어린애처럼

마지막이 될 우리만의 놀이

딱 한번만 더 하자 어른이 되기 전에

책을 펼쳐 간단하잖아

 

- 책을 펼쳐 中

 

 

공연을 보는 내내 소설 속 아이들과 보육원 아이들이 참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놀리던 아이에게 돼지 똥을 발라줄 만큼 심술 궂고 불만 많던 어린 시절 에이미는 비밀 연극 속 자신과 비슷한 메리를 연기하며 점차 메리처럼 긍정적이고 밝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메리가 콜린에게 그랬듯 그런 선한 영향력을 찰리에게 나눠줄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극중 가장 많은 변화가 있었던 찰리는 콜린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것은 없다’며 모든 의지를 잃고 자신만의 심연에 빠져 있었지만, 콜린이 처음부터 등이 굽지 않았고, 걸을 수 있었으며 긍정적인 마음 가짐만 있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자기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세상 앞에 보여줄 용기를 얻었다. 


디콘을 연기한 비글은 디콘처럼 자신이 동식물을 사랑하고 잘 돌볼 줄 안다는 것을 확인 받았고, 어린 메리를 잘 보살피던 마사처럼 언니 같은 싹싹함과 포용력을 지닌 데보라는 보육원에 남아 아이들과의 추억, 새로 들어올 아이들의 미래를 지켜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4명의 아이들은 이렇듯 각자의 길을 찾아 떠나게 되지만, 그들이 비밀 연극을 통해 찾아낸 아주 중요한 사실, ‘우리에게 한계가 없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은 그들을 하나로 묶어 언제든지 마음 한 구석에 있는 비밀의 화원으로 데려가 줄 것이다. 그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비밀의 화원 책을 펼치고 어린 시절처럼 상상력을 발휘해 연극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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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비밀의 화원]은 또한 공연의 내용적인 측면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독특하고 인상적인 부분이 많았는데, 그 중 몇 가지 포인트에 대해 짚어 보고자 한다.

 

 

 

Point 1. 공연장의 뒤덮은 입체 발향


 

이번 공연의 몇몇 장면에서는 그린 플로럴 계열의 발향이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해당 장면이 되면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비밀의 화원으로 입장한 아이들이 미니어넷을 가꾸는 장면에서 그 향은 온 공연장을 뒤덮을 정도로 존재감을 발휘 하였는데, 여태까지 어떤 공연에서도 경험해 본적 없는 후각적 요소가 가미되었기에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마치 4D 영화를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비밀의 화원과 너무나 잘 어우러지는 그 향은 화원을 가꾸는 주인공들의 모습 위로 오버랩 되며 해당 장면에 더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그들만의 비밀 연극이 아닌 나 또한 그들의 비밀의 화원에 초대되어 함께 공간을 가꾸어 나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Point 2. 무대 위 라이브 밴드


 

이번 공연에서는 OP석이 존재하지 않았던 만큼 무대 위에서 직접 라이브 밴드가 모습을 드러내고 연주를 했는데, 이 또한 공연의 포인트가 되어 주었던 것 같다. 별다른 공연 시작 신호 없이 라이브 밴드의 조율을 들으며 서서히 암전이 되었고, 관객들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비밀의 화원 이야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게다가 악기마다 아이들의 특성을 살렸다는 점도 인상 깊었다. 당차고 주도적인 리더십을 가진 에이미는 바이올린으로, 감정의 변화가 크고 예민한 찰리는 피아노로 표현되었고, 어딘지 쓸쓸한 기타 선율로 비글의 감정을 표현하고 엄마 같은 포근함을 지닌 데보라를 묵직한 첼로로 표현하였다고 한다.


라이브 연주자들은 이렇듯 극 중 4명의 아이들을 섬세하게 표현하고 몇 몇 장면에서는 종을 쳐서 청소 시간을 알리는 등 공연을 꾸려가는 데에 톡톡한 역할을 했다. 게다가 이들은 공연의 처음과 끝을 담당하며 앞서 공연의 포문을 자연스럽게 열어준 데에 이어 객석 불이 켜진 이후까지도 연주를 이어가며 공연의 여운을 더해 주었다.

 

 

 

Point 3. 비밀의 문으로 구분된 저 너머의 세상


 

이번 공연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존 정동극장이 가지고 있던 OP석 없이 진행된다고 하였기에 얼마나 무대를 넓게 써야 하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연을 관람한 후에야 그 이유에 대해 납득할 수 있었다. 초반 무대 구성은 상당히 심플했다. 보육원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굳게 닫힌 문 하나 뿐이었기에 도대체 화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내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닫혀 있던 문과 가벽이 열리고 드러난 저 너머의 화원은 황홀할 정도로 ‘비밀의 화원’을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비밀의 문을 기준으로 바깥은 현실의 영역이었고, 문 안 쪽의 비밀의 화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아이들은 ‘비밀 연극’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야 했다. 울새가 메리에게 준 낡은 열쇠가 그들에게는 닭고 헤진 비밀의 화원 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대 구성은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 없는 앞 쪽 공간처럼 삭막한 우리 일상에서도 비밀 연극과 같은 비밀의 화원으로 향하는 열쇠를 발견한다면 비밀의 문 너머의 환상적인 공간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아름다운 비밀의 화원은 어쩌면 그렇게 그저 문을 열기만 하면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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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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