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새로운 청바지로 갈아입기 [음악]

이제 그만 딱 맞는 걸로 갈아 입어.
글 입력 2023.03.17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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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오피니언은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를 담았음을 알려드립니다.

 

 

"한국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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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한국스럽다'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

 

나는 '한국스럽다'가 '혼재되다'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한다. (다소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비평가들이 한국을 폄하하고자 내뱉고 보는 바와 같은 말을 하려는 것이 결단코 아니다.) 좋은 것을 잘 섞어 한국만의 독보적인 경쟁력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K-POP은 지극히 '한국적'이다.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글로벌 장르로서 입지를 다져 온 K-POP은 국내외의 음악 트렌드를 퍼즐 맞추듯 조합하여 그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차별화를 이루었다.

 

2017년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지금은 반박이 불가한 톱의 위치에 있는 방탄소년단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문학, 영화, 음악 등 예술에 있어 분야를 가리지 않고 흡수하여 본인들만의 세계관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재즈, 록, R&B, 힙합, EDM 등 장르에 관계없이 하고픈 음악을 하면서도 방탄소년단만의 이야기를 풀어내어 전 세계의 열광을 이끌어 내었다.


요점은, 글로벌을 추구하면서도 '자기 이야기'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근데 이 부분이 현시점에 와서는 조금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 해외의 음악 트렌드에 맞춰 글로벌한 성공을 거두고, 그에 맞는 수익을 벌어들여 산업 내에서 살아남는 것도 중요하다. 뭐, 어떤 그룹이라도 '자기 이야기'를 안 하고 싶겠냐마는, 결국 K-POP도 산업인지라 시장이 굴러가는 형태에 맞춰 상품의 가닥을 바꾸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로 인해 아티스트의 색깔이 없어진다면 우리의 K-POP은 장기적으로 살아남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획사는 살아남고, 아티스트는 대체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운영이 K-POP 산업 전반에서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이 상황이 마냥 아름답진 않지 않나. 아티스트가 없는, 성공 공식에 따라 기계적으로 만들어 낸 음악이 어떻게 공감을 얻을까. 멀리서 보면, 이제 K-POP은 '한국적임'에서 벗어나 '해외 같음'을 지향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각설하고,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국적임'을 당장에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그룹에 대한 감상에 관한 것이다.

 

섞는 것에 지쳤다면, 새로운 걸 만들면 되잖아!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이 그룹은, 덜어낼 것은 덜어내고 좋은 향이 나는 것들을 모아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 보다 보면, 새로운데 왜인지 괜히 익숙하다. 깔끔한데 다양하다. 색이 너무나도 뚜렷한데 보는 각도마다 다른 빛깔이다. 그들의 음악에는 괜스레 어깨에 들어가 있는 힘을 빼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뭐냐면, 뉴진스의 하입보이(hype boy)다.


 

 

Cause I, I know what you like,


  

위의 소제목은 2022년 여름을 강타한 뉴 진스의 데뷔 앨범 두 번째 타이틀곡, Hype boy 중의 가사다. 아마 보고 계신 분들 중에 이 가사만 보고도 음이 생각나는 분 많을 거다. 그만큼, 작년 여름부터 대중 사이에서 불리기 시작한 이 곡은, 아직까지도 유수의 음원 사이트 차트 top5 안에 들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왜? 왜 사랑을 받는 걸까?


해당 곡의 뮤직비디오 속에서 춤추고 있는 다섯 소녀들은 보고 있는 이로 하여금 함께 춤추고 싶게끔 만든다. 이게 생각보다 큰 포인트다. 우리 민속놀이 중에 '강강술래'라고 있는데, 그거 우리 조상님들도 같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는 거 좋아했다는 뜻이다. 우리 민족은 조상부터 이어지는 흥의 민족인 것이다. 하다못해 양말 신으면서도 이상한 노래 흥얼거리지 않나. 흥이 많아서 그렇다. 더군다나, 사회적 시선을 조심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려, 일상 속에서는 절대 '자기만의 흥'을 풀어놓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모두가 따라 하기 쉬운 춤과 흥겨운 노래는,사람들 틈에 껴 튀지 않게 즐길 수 있다는 에서 사랑받을 수밖에 없다.

 

사실 이런 포인트는, 아이돌 3세대까지만 해도 중요한 요소였다. 원더걸스의 텔미,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 싸이의 강남스타일, 트와이스의 치어 업. 이름만 들어도 음과 춤이 생각나는, 그때 그 사람들과 함께 즐겼던 히트곡들이지 않은가. 이 노래들의 특징은, 그 시대에 살았던 나와 내 친구들, 그리고 함께 이 노래를 들었던 사람들과의 추억이 떠오르게끔 한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때 이 노래를 불렀던 가수들과 그때의 아이돌 산업이 어땠는지도 생각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음악에는 '그때 참 좋았지'하며 그 시절의 사람들과 음악을 추억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근데, 힙합과 EDM에 맞춰 어려운 춤을 추고 따라 부르기 어려운 가사들을 빠르게 반복하는 요즘 아이돌 노래는, 대중의 접근성이 조금 떨어진다. 아이돌이 차지하는 파이가 압도적이게 된 현 음악 시장에서, 누군가의 팬이 아닌 대중이 소비할 만한 '신나는' 노래가 많이 없다는 뜻이다. 발라드나 힙합도 차트 상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 않냐고 반박한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여기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모두가 함께 따라 하며 즐길 수 있다.'라는 포인트이다. 아쉽다. 이제는 팬덤이 대중이라는 말도 맞긴 한데, 팬덤이 아닌 사람이 아직은 더 많지 않은가. 음악 시장의 불합리함에서 비롯된 불신에 지쳐 더 이상 음원을 의욕적으로 소비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을 위한 음악은 이제 없는 걸까, 하는 회의감이 드는 동시에, 이전의 K-POP이 지녔던 약간의 촌스러움이 그리워진다. 모두가 함께 즐거이 부르고 그 춤을 따라하며 삶 속에서 유쾌함을 찾아내게 해주던 그 시절의 음악들이.

 

뉴진스가 가진 순정의 힘은 그래서 빛을 발한 게 아닐까? 강하게 귀를 때리는 사운드와 눈을 피로하게 하는 비주얼 이펙트들에서 벗어나, 딱 흰 티에 청바지, 거기에 운동화를 신은 느낌이 드는 편안함을 뉴진스라는 그룹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막상 그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어보면, 다소 생소한 장르임을 눈치챌 수 있음에도 말이다. 사실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듣기에 편안하고, 따라 부르기 쉬우면 된다. 거기에 더불어 그룹의 방향성 안에 트렌드와 인사이트까지 반영되어있다면? 어떻게 성공하지 않을 수 있을까. 뉴진스가 보여준 전략은 지극히 당연하여 간과 당하던, 음악의 '정서'와 '공감대'라는 요소를 충족하는, 또 하나의 성공 공식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뉴진스가 데뷔하면서 대한민국의 음악 시장에 보여준 건, 다름 아닌 K-POP만이 가지고 있었던 촌스러움이다. 다같이 춤추고, 해맑게 웃으며 함께하던 연하늘색의 그 시절 K-POP.

 

음악에도 향이 존재하는 걸까?

 

괜스레 그런 생각이 든다. 뉴 진스의 Hype boy가 훗날에는, 다사다난하면서도 행복했던 2022년을 추억하게 하는 향으로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사실.. 그런 갈증은 채우려고 하면 안 돼. 갈아 입는 게 답이야.



밖에서의 일정을 모두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분명 실내인데도 불구하고 그 안에 떠도는 공기가 바깥보다 조금 더 쌀쌀하다.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거실 TV 앞 소파에 앉으면, 아무도 없는 집의 한적함이 알랑거리는데 그게 이상하게 편안하다. 난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인가, 하면 그런 건 아니다. 그러면, 한적한 게 좋은 건가? 생각해 보니, 한적하면 외롭다. 외로운 게 좋진 않잖아, 싶다가도 때때로 외로움에 위로받았던 기억이 떠올라버리면 할 말이 없어진다.


왜 사람은 일관적일 수가 없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하다 보면, 학교 다닐 때 수학 시간이나 역사 시간에 그리던 수직선이 불현듯 떠오른다. 흰 종이 위에 반듯한 직선을 그리기 위해 집중하고 나면 어느새 우리가 아는 그 수직선이 생기는데, 그 수직선은 온전히 수직선으로만 존재할 수는 없지 않나. 수직선 위에 점 하나. 점 위에 글자 몇 개, 설명 한두 줄. 액세서리 몇 개 정도는 있어야 그저 종이 위에 그어졌을 뿐인 것의 쓰임을 확정할 수 있다.

 

결국 꾸며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건데, 가끔은 그냥 직선인 수직선도 있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꼭 어떠한 걸 달고, 무언갈 설명해야만 쓸모 있는 걸까? 반항하는 심정으로 그냥 죽 죽 반듯하지도 않은 선들을 막 그어본 적도 있다. 근데 종국에 보면, 또 선과 선들이 모인 집합체더라. 하나의 선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아서, 옆에 있는 선들과 함께 보게 되는 거다. 이 변덕스러운 감정에 혀를 내두르다가도, 어느새 보면 또 그러고 있다.


쓰이기 위해서, 쓰이고 싶어서. 대롱대롱 달게 된 수많은 이름들과 책임들은 삶을 무겁게 한다. 또,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만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것들을 내다 버리지도 못한다. 그냥 '하나'일 뿐인 인간은 쓸모가 없어서 도태되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냥 물감처럼 사람들 사이에 섞이고 싶다가도, 내 존재가 사라지는 건 또 싫지 않나. 당연한 심리지만, 억울하기도 하다.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들이 이젠 버겁기만 한데, 버리지도 못하고, 떼려다가도 하나 더 붙이기 십상이니.

 

정리하자면, '떼는 게' 어렵다는 거다. 사람은 일관적일 수 없는, 수많은 의도와 책임을 안고 살아야 충만할 수 있는 존재이니만큼, 그냥 '하나로서' 있는 것이 가장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이러한 상황과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갈증을 느낀다. 온전히 깨끗한 '하나'로서 존재하고픈 갈증. 이 심리는 어디서나 일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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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것들 사이에 끼어 있는 수수한 것이, 조금은 촌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실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무겁지만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했던 장비들을 버리고, '이렇게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강박을 내려 놓은 이가 오히려 더 빨리 틈새를 찾아 내어 달려나갈지 모른다. 꼭 좋은 장비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그냥, 나한테 잘 맞는 청바지 하나면 된다. 지금보다 더 빨리 달릴 수 있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 입어 버리자. 그게 더 삶을 가볍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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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서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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