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의 서울은 볼 것, 만날 것의 천지인지라 아주 분주했다. 나는 그 속에서 이 갤러리, 저 박물관, 그 미술관을 온종일 종횡해야만 했다. 왜인지 조금 피곤한 것 같았다. 깔끔하게 배열된 월 텍스트들, 그리고 좋은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 다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었지만 보다 보니 골치가 아팠다.
“이걸 다 공부하라는 걸까?”
오랜만에 열린 축제에서 각자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는 이들과 만나고 지나치기를 셀 수 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처음 본 것들이 건네는 말들을 이해하려, 한 자리에 서서 골몰하는 시간은 점점 길어져만 갔다. 그렇게 황홀한 듯한 광경 속에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이 그리 기껍지는 않았다. 작고 어렸을 적 수많은 발과 무릎들이 지나치는 어딘가에 홀로 남겨졌던 기억을 떠올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처음부터 이랬는가? 분명 아니었다. 나는 언제인가 작가가 마련하는 소통에 매료되어 그림에 푹 빠져들고,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들에 감응하는 애호가였다. 사실은 지금도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지루해하면서도 좋아함을 포기하지 못하고 매달리는 것을 보면. 다만 애호와 열정, 그 사이에 존재하는, 형용못할 공백(空白)과 같은 것을 나는 너무나 생경하게 인지해버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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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마크 로스코와 이우환의 작품이 함께 전시되고 있는 한남동의 페이스 갤러리에 다녀왔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전시에 대해서는 전시가 개최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굳이 내 발로 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전시 종료 직전까지 방문을 미루려 했을 뿐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로스코의 언어는 극도로 정형화된 이론가들의 언어로 번역되어 하얀 벽 어디쯤에 정연히 놓여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기대치가 상승하는 회로를 막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광대하고 공허한 미술관을 찾길 거부하는, 아주 소극적인 관람자로서의 태도-방관자적인 태도라고 해도 무방하다-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랜만에 작품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의 산뜻함을 느끼고 곧장 길을 나선 데엔, 너무나 좋은 도슨트의 역할이 컸다. 소개하자면 책, 『마크 로스코, 내면으로부터』이다.
이 책은 아버지의 그림을 한평생 바라봐 온 아들의 기록이다. 누구보다 가까운 곳에서, 한 명의 거장이 고민하며 걸었던 길을 따라 걸었던 이의 소회(所懷)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글자와 행간 사이 군데군데 애정이 녹아 있는 것 같기도, 그리움이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독자를 감화시키는 감정과 언어를 자연스럽고도 능란하게 활용했다. 마치 마크 로스코가 관람자가 감응할 수 있는 색의 언어를 찾고 작품화한 것처럼 말이다.
또 이 책의 포인트는, 이 책이야말로 마크 로스코가 홀로 몰두하고 만들어내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에 대해 쏟아졌던 당시의 말들까지도, 그때의 기억을 간직한 이의 손으로 남긴 증거물이라는 점이다. 냉철하고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미술의 흐름 속 로스코의 작품을 바라보고, 딱딱한 언어로 부연한 것이 아니다. 다소 주관적일지라도 그 시절의 광경을 한 “사람”의 시점으로 담았다는 것을 읽을수록 실감하게 된다. 글로 쓰인 책이지만, 당시를 보여주는 일종의 창문과 같은 것이다.
크리스토퍼 로스코가 “한 사람으로서” 마크 로스코의 작품과 대면하며 만들어 낸 텍스트는 창문이 되어 우리가 로스코와 마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는, 마크 로스코가 그림을 창문으로 만들어 우리가 내면을 마주할 수 있게 도와준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 부자(父子)는 대중 속에, 껍데기 같은 대화 사이에 묻혀 버린 개인을 비난하지도, 채찍질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개인이 적극적으로 그림과, 그리고 내면과 소통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준다. 내면으로 통하는 창문이자 누구나 내재하고 있는 공백이 된 작품, 그리고 그것과 조응하는 텍스트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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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조응: 이우환과 마크 로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