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화양연화가 있다면 이런 거겠지 - 영화 '6번 칸'

우연, 인생의 한 짧은 순간의 아름다움
글 입력 2023.03.15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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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와 인생


 

기차와 인생의 공통점. 한 번 달리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선형적이다.

 

삶은 시간에 맡겨진 채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역행하거나 병렬적으로 살 수 없다. 인생이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여정이라면 기차는 출발역과 종착역이 있고, 철로에 정차역이 있다면 사람들은 삶 중간중간 시기상으로나 사건상으로나 중요한 부분을 정해 기억해 둔다.

 

 

 

여정의 시작


 

라우라는 애인과 위태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가 그 관계를 끝맺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이별 이후 다가올 고독이 무섭기 때문이다.

 

그는 타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유학생이다. 러시아어는 곧잘 하는데도 숫기가 없는 성격 탓인지, 아니면 여자친구와 함께 있는 파티 한가운데에서도 혼자인 것 같다는 외로움 때문인지 사람들과 썩 잘 어울리고 있지 못하다.

 

라우라는 곧 열차를 타고 무라만스크로 가는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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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의미 1: 필연


  

라우라에게 홀로 떠나는 이번 여정은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이다. 애인과의 관계가 다시 돈독해질 마지막 기회.

 

여행은, 게다가 며칠 동안 좁은 열차 칸에 실려 고생하고 오로지 둘만 고립되어가며 하는 여행은 나중에 둘이 헤어지든 말든 어느 정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포장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유학 갔다 오는 학생들은 유학생활을 꼭 여행으로 마무리하지 않나. 라우라에게 이번 여행은 계획이었고, 여행은 그가 생각한대로 흘러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라우라는 여자친구와의 여행을 빈틈없이 계획할 수는 있어도, 이리나의 일정을 예상할 수는 없었고, 이리나의 관심을 끌 만한 또다른 새롭고, 재미있고, 화려한 사람들이 그의 삶으로 들어오는 것까지 막을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여행의 의미가 사라진 채 라우라는 기차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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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의미 2: 우연


  

외로움을 많이 타는 라우라가 홀로 떠난 여행에 만족할 리가 없다. 그런 라우라의 앞에 나타난 건 료하. 료하의 첫인상을 말하자면 ‘진상’이라는 단어 말고는 설명할 게 없다.

 

술에 잔뜩 취해서는 (가뜩이나 날카롭고 자기 영역 확실한) 라우라의 자리까지 넘어오며 이야기를 해댄다. 고성방가에 욕설에 무례한 말에 지저분한 자리까지. 라우라가 가장 먼저 고른 선택지는 ‘회피하기’다. 자리를 바꿀 수도, 무례한 짓을 하지 말라고 료하에게 직접 이야기할 수 없는 라우라는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기로 한다.

 

시끄럽고 좁은 열차 칸을 피해 도망 나온 기차역은 고요했다. 그리고 쓸쓸했다. 라우라는 이리나에게 전화를 걸지만 벌써 그에게서 거리감을 느낀다. 다시 외로워지는 게 무서운 라우라는 다시 료하가 있는 6번 칸으로 되돌아간다.

 

다시 출발하게 된 여정에서 라우라와 료하는 가까워지기도 하고, 웬 핀란드 남자와 여정을 함께하며 서먹해지기도 하고, 결정적으로 라우라가 아꼈던 추억이 담긴 캠코더를 잃기도 한다.

 

그러면서 라우라는 점점 자신을 얽매던 과거의 필연과 멀어지고 우연에 몸을 맡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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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의 의미 3: 인연


  

료하와 함께한 라우라의 여정을 생각해 본다. 료하는 라우라가 처음부터 원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는 암각화를 보기 위한 여정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사람이다. 료하와 여행을 함께하는 것은 라우라에게 계획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그는 료하를 피할 수 없었고, 결국 마음을 열게 되었다.

 

무르만스크에서 라우라가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가 아니라 료하에게 이끌려 암각화를 보러 가게 되는 과정이 참 흥미롭다. 이리나와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마음도 멀어지고, 생각보다 가는 길은 훨씬 험난해 일반적인 관광 코스로는 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순간쯤 이미 라우라의 여행의 목표가 꼭 암각화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목표를 잃었음에도 라우라의 여정은 계속된다. 료하의 친절과 사랑 때문이다.

 

두 사람의 여정이 다음을 기약하지 않고 끝난 점이 전혀 슬프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 라우라는 훗날 유학생 시기 이야기를 할 때 꼭 료하의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이리나의 이야기는 그에 비해선 적게 하겠지. 캠코더 속 기억은 날아가고, 기록하지 않은 추억은 머리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인생 역시 그럴 것이다. 굳이 기록하려고 두지 않은 기억들이 추억으로 남는 것. 라우라는 마지막에 웃는다. 꽤 크게 웃는다.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라우라가 혼자 있다고 느끼지 않는 순간이지 않을까.

 

이 영화는 두 사람이 고독을 공유하는 이야기이다. 활활 타는 불보다는 꺼지고 남은 잔불, 생각보다 오래 가는 불씨 같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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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스타 비투'


  

료하의 고독은 어떤 것일까? 홀로 노동하러 먼 곳으로 떠나고, 열차에서 처음 만난 사람을 위해 친구도 만들어 주고 도와주지만 자신이 그린 그림은 차마 주지 못하는 사람. 그렇지만 자신이 일하는 곳까지 찾아온 사람에게 온 방법을 다 동원해 암각화를 보여주고, 결국 그림과 ‘하이스타 비투’를 내어줄 수 있는 고독과 사랑은 어떤 것일까?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야기다.

 

 

[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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