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우리는 '어른'이라는 장엄한 단어에 갇힐 때가 있다. 그 속은 별거 없는걸 알면서도, 어른이라면 으레 성숙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듯이. 사실은 수많은 물을 엎질러버리고 쓸고 닦고 하면서 말이다.
이 연극은 그런 어른들의 실수와 미성숙한 태도를 오롯이 담아냈다. 어른들의 문제로 두 아이는 상처받고 매우 고통스러워하지만, 결국 누군가의 자식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성을 갖고 성장한다.
어른들에게 받은 상처로 함께 아파하는 두 소녀
"아줌마 남편이랑 우리 엄마랑 바람났어요. 그리고 우리 엄마는 지금 임신 중이에요"
윤아와 주리의 첫 만남은 학교 옥상에서 이루어진다. 주리는 자신의 아빠가 윤아의 엄마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윤아를 불러낸다. 두 소녀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크게 동요하고, 서로의 부모를 탓하며 치고받고 싸운다. 윤아와 주리의 만남은 늘 옥상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함께 아파하고 분노하고 울고 웃다 이내 동질감을 느낀다.
윤아와 주리가 각자 부모와 맺는 관계는 조금 달랐다. 윤아는 자기가 엄마를 '키웠다'고 표현한다. 윤아는 늘 엄마의 밥을 챙겨주고 엄마를 걱정하며 잔소리한다. 오히려 윤아의 엄마는 윤아보다 자신의 행복을 더 중요시하며 본인의 상황에 집중한다. 정작 보호받아야 할 윤아는 엄마로부터 제대로 된 사랑을 받고 있지 못했다.
주리는 불륜 사실을 들킨 이후 도망만 다니는 아빠를 찾아다니며 답답해한다. 결국 아빠를 마주한 주리는 그동안 참아왔던 속마음을 쏟아낸다. 나와 엄마 인생에는 아빠가 있는데 아빠 인생에는 왜 아빠만 있냐,라는 원망과 함께 이제 아빠 딸 졸업할 거라는 말을 남긴다.
주리는 그저 딸이라는 이유로 아빠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그 무게를 감당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딸이라는 역할과 스스로를 분리하며 상처를 덜어내려는 주리의 모습이 그녀의 성장을 기대하게 했다.
비틀어져 버린 어른들의 관계, 한층 성장해나가는 두 소녀
윤아의 엄마와 주리의 아빠 사이에서 생긴 아기는 세상을 느끼기도 전에 하늘의 별이 된다. 윤아와 주리는 아기를 기억하기 위해 초음파 사진을 넣은 타임캡슐을 옥상 환풍구 밑에 묻어둔다. 생명에 대한 존중과 책임의 의미가 되기도 하는 이 행동으로 인해, 두 소녀는 한층 성장하며 어느새 어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상황의 심각성과 달리 극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배우들의 대사는 자연스럽게 오갔으며,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행동이 요란해지지도 않았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인물 간의 보이지 않는 긴장감을 키웠으며, 상황에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주리의 엄마와 윤아의 엄마가 만나는 장면이었다. 주리의 엄마는 직접 죽을 끓여 출산한 윤아 엄마의 병실을 찾아간다. 주리의 엄마는 윤아 엄마를 만나 울분을 터트리지도 않았으며 머리를 쥐어뜯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직접 끓인 죽을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눈빛과 대사, 행동 하나하나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들 사이에 오랫동안 유지되는 침묵이 관객들을 숨죽이게 했다.
*
연극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양했다.
이 극이 조명하고자 했던 건 단순히 어른들의 실수와 책임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들도 부모로부터 자식이라는 역할을 분리하듯, 부모 역시 가정 안에서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바라봐 주길 바랐던 것 같다.
극 중 주리는 아빠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물론 주리 아빠의 행동이 용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역시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에 가족으로부터 받고 싶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