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오프라인 모임을 망설인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낯선 사람을 만나는 것에 대한 약간의 긴장감. 그리고 그걸 들키지 않기 위해 소모해야 할 에너지는 생각만 해도 피로했다. 영화든 공연이든 혼자 보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책을 통해 사람들과 모인다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독서 모임에 참여하게 된 계기 또한 한 가지였는데, 책이라는 하나의 매개체로 모인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이유가 컸다. 나이, 직업, 성별은 중요치 않았다. 같은 책을 읽고 다양한 생각을 나누고 싶었다. 어떤 날에는 책을 읽고 누군가와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며 함께 여운을 곱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에서 비롯된 용기가 이번 모임의 소중한 인연을 만들었다.
모임은 총 네 번 이루어졌다. 첫 만남은 어색하면서도 새로운 공기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고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연스레 각자 선호하는 장르와 어려워하는 장르의 책들을 알게 되었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은 공통적이기도 해서 반가웠다.
주로 국내 소설을 애호하는 나는 어떤 작가님을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에 김애란 작가님을 언급했다. 나는 그녀가 쓴 ‘비행운’과 ‘바깥은 여름’이라는 책을 참 좋아한다. 이외에도 최진영 작가님의 ’해가 지는 곳으로‘, ’구의 증명‘을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현실에 있을 법한 일들과, 인물의 우울한 심리에 마음이 좀 더 기우는 듯하다. 나와 반대로 외국 작품을 좋아한다는 분과,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장르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분도 계셨다. 편향된 나의 독서 습관을 고쳐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불쑥 솟았다. 어쩌면 모임에 나오길 잘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칠리아에서의 대화
우리는 한 사람씩 돌아가며 총 세 권의 후보를 냈고, 투표 하에 이 달의 책을 선정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우리가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된 책은 저자 엘리오 비토리니의 ’시칠리아에서의 대화’였다.
마지막 장까지 읽고 책을 덮은 뒤 약간의 걱정이 몰려왔다. 내용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았고 이야기의 흐름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물론 추상적인 표현이 많이 쓰여있긴 했지만 내가 제멋대로 상상한 그림이 작가의 의도에 확실히 어긋난 것이면 어떡하나 싶기도 했다. 꺼낼 이야기가 많지 않아 조금 씁쓸한 마음으로 모임에 나갔다.
다행히 모두가 나와 비슷한 걱정을 안고 나왔다. 우리는 조심스레 서로의 감상을 물었고 어려웠다는 말과 함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이 책에 대한 감상은 조금 줄이고 두 번째 책으로 넘어가겠다.
사이코패스 뇌과학자
두 번째로 선정된 책은 저자 제임스 팰런의 ‘사이코패스 뇌과학자’다.
미국의 신경학자인 제임스 팰런은 사이코패스들의 뇌를 분석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사이코패스 특성을 지닌 이들의 뇌를 스캔해 연구하던 중, 우연히 자신의 뇌를 스캔한 사진과 그들의 뇌가 많이 닮아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단순히 제임스 팰런이 충격을 받고 가족들과 주변인들의 멸시를 받고 끝난다면 이 책의 매듭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터다. 제임스 팰런은 자신의 뇌가 사이코패스의 뇌와 비슷하지만, ‘왜 자신은 범죄를 저지른 사이코패스가 되지 않았는가‘에 더 의문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서도 제임스 팰런이 사이코패스의 뇌 특성을 지닌 것이 자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과연 그처럼 덤덤히 뇌 사진을 받아들고 주변인들에게 이 사실을 당당하게 알리며 멀쩡히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심지어 제임스 팰런은 자신의 뇌가 이슈화되며 강의 초청까지 받는 상황에 대해 매우 흥미로워한다. 또한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자신 때문에 분노하거나 곤란해했던 일화를 언급하며 ‘이때마다 그들은 내게 사이코패스라고 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내가 봤을 때 그의 뇌는 사이코패스의 뇌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담대하고도 뻔뻔한 성향은 그를 사회에 악이 되는 사이코패스가 아닌, 직업적으로 튼튼한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성공의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의학적, 전문적 용어가 다수 등장한다. 과학적 접근을 다룬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제임스 팰런을 둘러싼 수많은 일화와 그의 의견을 듣는 일은 굉장히 흥미롭다. ‘차가운 뇌’와 ‘뜨거운 뇌’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최근 많은 이들이 관심을 두었던 MBTI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자면 차가운 뇌는 T성향(이성)이 조금 더 작용하고 뜨거운 뇌는 F성향(감정)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고 볼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임스 팰런은 확실하게 차가운 뇌가 90% 작동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다 뜨거운 뇌를 지닌 사람의 눈으로 제임스 팰런을 바라보자면, 가족들이나 친구들을 대하는 제임스 팰런의 예상치 못할 행동은 무자비하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조금 이기적인 태도가 그에게는 좋은 무기이자 방패가 될 수도 있겠다는 마음도 내심 들었다. 내가 그의 일화를 흥미롭게 바라본 것은 어쩌면 나와 극명히 다른 사람의 행동을 제 삼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호기심과 방관을 빙자한 모종의 대리만족 아닐까.
영원한 천국
정유정 작가의 ‘영원한 천국’은 꼭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소설책이다. 장편소설로 (내 기준) 책이 꽤나 두꺼워서 언젠가 읽어야지, 하며 미뤄두었던 책이기도 하다.
‘영원한 천국’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다루는데 작가는 이를 ‘야성’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작가가 말하는 야성과, 이 책에서 주된 배경으로 등장하는 ‘롤라’와 ‘드림시어터’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원한 천국‘에서 등장하는 롤라와 드림시어터는 현실 세계 같은 가상 세계다. 인간의 신체와 그를 둘러싼 세상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구현된다. 여기서 롤라와 드림시어터를 구분 짓자면, 드림시어터는 롤라라는 가상 세계 안에서 한 번 더 생성된 가상세계라 볼 수 있다.
롤라에서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불러올 수 있고 어떠한 세상이든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결국 이 모든 게 가상세계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가상세계에서 성취한다 한들 허구라는 것을 안다면 어떤 재미와 욕망이 있을까. 결국 롤라 안에서 사람들은 드림시어터라는 극장을 만들게 된다. 드림시어터에서는 특정한 인생의 시나리오를 정한 채 그 세계로 들어가 살 수 있고, 죽음을 끝으로 다시 롤라로 돌아올 수 있다. 마치 오랜 꿈, 그렇지만 매우 현실 같은 꿈을 꾸다 돌아오는 것과 같다. 롤라와 다른 점이 있다면, 드림시어터에서는 이 세상이 가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설계된 그 세상이 현실인 것처럼 믿고 살아갈 수 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여러 의견들을 던졌다. 처음에 나는 롤라라는 세계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원하는 사람을 눈앞에 불러오고, 원하는 세상을 내가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본래 살던 현실 세계를 망각할 수 없고 이 모든 게 쉽게 얻어지는 가상이라는 것을 인지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삶에 대한 욕망과 성취욕이 현저히 줄어들 것 같다. 그렇기에 롤라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결국 드림시어터를 계속 찾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결국 인간에게 욕망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욕망이 없다면 성취가 없을 테고 성취가 없다면 결국 삶을 이루는 것들은 무엇이 될까.
욕망에 대한 생각을 나누다 보니 이야기는 자연스레 권태와 불안에 대해 흘러갔다. 삶은 권태와 불안의 연속으로 이루어졌고, 우리는 그 사이를 넘나들며 자신의 균형을 잡아가는 걸까. 삶에 안정만 있다면 그 또한 권태로울 테고, 불안정만 있다면 그 또한 심적으로 굉장한 압박이 있을 것이다. 결국 불행이 있어 행복이 존재하고, 행복이 있어 불행이 존재하는 맥락과 닮아있는 것 같다.
정유정 작가님의 소설은 스릴러로 유명한데, 사실 ‘영원한 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어쩌면 사랑 이야기를 다룬 부분이 아닐까 싶다. 여행지에서 처음 만난 제이와 해상은 서로에게 자연스레 스며들고, 결국 서로의 아픔까지 보듬어줄 정도로 사랑하게 된다. 경주와 지은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사랑에 있어서 네 사람의 공통된 사실은 비극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가슴 아프지만, 되려 행복한 결말이 아니기에 그들의 사랑이 더 유효해 보이는 건 역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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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오프라인 모임은 개인적으로 내게 긍정적 영향이 컸다. 우선 책에 대한 접근법이 굉장히 다양해지고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다.
일례로 ’영원한 천국‘에 대한 감상평을 나누다 소설책을 읽을 때 중점을 두는 것이 각자 매우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 주로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며 서사를 따라간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동안 많이 웃고 운다.
활자가 마냥 활자로 남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인물이 일어나서 걷고, 뛰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랑을 하고, 웃고 우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때에는 정말 그 장면이 머릿속으로 생생하게 그려질 때가 있다. 어쩌면 책에서 떼어내 살아있는 인물을 만드는 동안 감정의 동기화가 이루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문체나 이야기의 전개, 설정의 오류 등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거다. 그래서 차마 내가 짚어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관점으로 한 번 더 책을 훑는 기분이었다.
나와 함께 책을 읽어낸 그들에게도 내게 그랬던 것처럼 긍정적 자국이 많이 남아있기를 바라며 이만 글을 마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