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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사이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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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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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 엄마는 자꾸만 작은 캐리어에 이것저것 챙겨 담았다. 혼자 지내는 내가 걱정이 되는지 이런저런 잔소리를 했다. 뭘 해도 안심되지 않는다는 듯 혀도 찼다. 그러면서 가방에는 자꾸만 뭘 챙겨 담았다.


부산역까지 배웅해 준 엄마와 아빠를 등지고 돌아섰다. 여러 번 경험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순간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내게는 헤어지는 순간이 늘 낯설다. 덜 슬플 순 있지만 슬프지 않을 순 없다. 내려올 땐 캐리어가 가벼웠는데 어느새 무거워져 자꾸만 턱에 걸렸다. 덕분에 발걸음도 자꾸만 느려졌다.


열차 안에서 읽는 책은 정적인 곳에서 읽는 것보다 훨씬 재밌게 느껴진다. 잠시도 머물지 않는 풍경과 제자리에 가만히 놓여있는 글자의 대비감이 묘하게 흥미롭다. 역방향으로 앉아 바라보는 차창 풍경은 멀어지기 바쁘다.

 

열차는 책 읽기 좋은 장소지만, 울기 좋은 장소는 아니다.


하필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와서, 하필 엄마가 바리바리 싸준 캐리어가 무거워서, 하필 남겨진 마음에 대해 생각해서, 하필 이 타이밍에 이 책을 읽어서, 그래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내가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내가 서울로 올라가고 나면 어딘가 허전하고 조용하다는 엄마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올라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장난스레 말하던 모습이 겹쳐졌다. 엄마도 나처럼 헤어지는 것은 늘 낯설어 보인다.

 

*

 

윤성희 작가님의 <자장가>는 <음악소설집>에 속한 다섯 편의 이야기 중 하나이며, 주인공인 '나'가 세상을 떠난 뒤 엄마 곁을 맴도는 모습을 담담히 그려낸 작품이다. 엄마에게 보이지 않는 ‘나’는 엄마가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자는 모습, 엄마가 ‘꽈배기 이모’를 만나 술을 마시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어릴 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엄마의 모습을 지켜본다. 그리고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 엄마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어렸을 적 엄마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잘 잤으면 하는 마음으로.


읽는 동안 나는 상실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아주 없어진다. 본래 있던 것이 사라진다.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다. 상실은 부재를 동반한다.


때로 존재는 부재를 통해 더욱 선명해진다.

 

 


짝짝이 양말


 

고등학교 입학 후 네 번째로 맞이하는 ‘짝짝이 양말의 날’

 

‘나’는 한 달 전부터 사둔 양말을 꺼내 신는다. 하나는 웃는 얼굴이 그려진 흰색 양말, 또 하나는 화난 표정이 그려진 검은색 양말이다.


‘짝짝이 양말의 날’은 재작년 퇴임한 교장 선생님이 만든 날이다. 한 학생이 기말고사가 끝난 뒤 투신자살을 하자 충격을 받은 교장 선생님은 이십 대 때 삼수를 앞두고 자살한 옛 친구를 떠올린다.


 

“우울한 날에는 이 양말을 신어줘”

 

 

‘나’를 따라 짝짝이 양말을 신은 엄마는 왠지 덩달아 신이 난다. 엄마는 ‘나’를 학교 앞까지 데려다준다. 깜빡하고 짝짝이로 신고 오지 않은 학생들은 서로의 양말을 바꿔 신는다. 엄마는 그 모습이 참 예쁘다고 했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짝짝이 양말의 날’만 되면 유독 야외수업을 강행하는 체육 선생님 덕분에, 학생들은 눈사람 만들기 대회를 펼친다. 물구나무를 선 눈사람도 짝짝이 양말을 신고 있다.

 

수업을 마친 ‘나’는 ’꽈배기 분식’으로 달려간다. 가게 이름은 ’꽈배기 분식’이지만 꽈배기를 팔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자연스레 쫄면과 우동을 반반씩 먹었다. 함께 살고 있지 않은 아빠가 그리워지는 날이면 ’나‘는 꽈배기 분식으로 달려가 폭식을 했고, 엄마는 ‘나’를 위한 외상 장부를 만들어 주었다.

 

꽈배기 분식의 이모는 엄마의 학창 시절 친구이다. 꽈배기 이모의 학창 시절 별명은 스크류바였는데, 어릴 적 스크류바 광고 노래를 하도 불러서 그런 별명이 생긴 것이다. 이모는 그 노래를 암에 걸렸던 동생이 좋아하던 노래라고 했다. 수술 하루 전 우연히 듣게 된 그 노래는 동생이 긴 항암치료를 견딜 수 있었던 유일한 노래였다.

 

분식집에서 배를 채운 ‘나’는 횡단보도 초록불이 깜빡이는 것을 보며 충분히 건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고, 교복 셔츠에 튄 빨간 국물을 발견하고 집에 가서 빨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달려오는 트럭 소리를 듣게 되고, 깜빡이던 초록불은 빨간 불로 바뀌었다. 나는 정신을 잃는다.

 

으레 예상되지 않는 것이 더 흥미롭다곤 하지만, ’나‘가 사고로 갑작스레 죽는 전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눈 덮인 새하얀 동네와 학교 운동장, 너도 나도 짝짝이 양말을 신은 채 웃고 떠드는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 물구나무를 선 눈사람, 하교 후 분식집으로 달려가 쫄면과 우동을 먹는 ’나‘의 얼굴, 그리고 그런 ’나‘를 반갑게 맞아주는 분식집 이모의 얼굴. 이 모든 정겨움이 ’나‘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이 어딘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뒷이야기까지 모두 읽고 나서야 작가가 초점을 맞추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실 후 남겨진 것들


 

'나'의 죽음 이후로는 '나'의 시선을 통해 엄마의 삶이 조명된다.

 

장례식이 끝난 뒤 엄마가 혹여 불면증에 걸려 잠을 잘 자지 못할까 걱정된 '나'는 엄마 곁을 맴돈다. '나'의 예상과 달리 엄마는 새근새근 아기처럼, 고요하게 잠을 잔다. 가지런히 두 손을 배꼽 위에 모은 채. 안도감과 동시에 '나'는 왠지 모를 서운함을 느낀다. 엄마가 조금은 잘 못 자길 바랐다. 엄마가 잘 자서 슬펐고, '나'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없어 슬펐다.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고 싶지만 들어가는 방법을 알 수 없다.

 

'나'의 생일날이 되었다.

 

엄마는 미역국을 끓이고 ‘나’가 좋아하던 매운 등갈비찜을 요리해 식탁 위에 올려놓는다. 국그릇도 하나, 밥그릇도 하나다. 엄마는 컵에 콜라를 따른 채 말한다.


"생일 축하해."

 

남은 음식을 챙긴 엄마는 꽈배기 분식으로 향했고, 꽈배기 이모와 소주를 마셨다. 엄마는 원래부터 매운 걸 잘 먹는 사람처럼 매운 등갈비찜을 먹었다.

 

 
“한번은 내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새끼, 하고 말했거든. 그랬더니 막 우는 거야. 너무나 서럽게. 내가 왜 우냐고 물었더니 글쎄,” 글쎄, 까지 말하고 나서 엄마는 연이어 소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자기는 눈에 들어가기엔 너무 크다고. 그래서 울었대. 그게 갑자기 생각나네.” 엄마의 말에 이모도 웃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슬픔을 슬픔으로 표현하지 않는 문장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나’를 그리워하는 모습이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매운 등갈비찜과 연이어 마시는 소주 두 잔은 엄마의 마음을 대변하는 장치가 된다.

 

엄마는 분식집 천장에 낙서된 '나'의 이름을 한참 보더니 말한다.

 

 
"그 애 꿈을 꾸고 싶어서 나는 잠을 자. 어떤 날은 종일 자기도 해. 그런데도 한 번도 꿈속에 나오질 않아. 그게 무서워."
 



자장가


 

'나'의 시선을 통해 비치는 것은 비단 엄마의 모습만은 아니다. '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따라 버스 종점까지 가기도 하고, 그곳에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따라가 배드민턴을 치는 이들을 구경하고, 저녁이 되면 또 아무 버스를 타고 아무 곳에 내려 테니스 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장마가 지날 때까지 한곳에 머무르던 ’나‘는 우연히 자신과 비슷하게 교복을 입은 아이를 마주한다. 둘은 서로를 알아본다. '나'는 이 년 전 교통사고로 죽은 그 아이를 통해 엄마의 꿈속에 들어가는 법을 알게 된다. 생각보다 간단했다. 같이 누워 손을 잡는다. 그리고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깜빡 졸기를 기다린다.

 

엄마가 침대에 누우면 ‘나’는 엄마 곁에 누워 오른손을 잡는다. 첫 째날 ‘나’는 엄마의 꿈속에서 너무 커버렸다며 엉엉 울었고, 둘 째 날은 엄마와 함께 킥보드를 탄다. 셋 째 날은 엄마가 일하는 동물원 매점이 나왔고, 넷 째 날엔 할머니 무릎을 베고 자는 어린 엄마를 만난다.

 

어느 순간 ‘나’는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무릎을 벤 어린 엄마의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나’는 엄마의 엄마가 되어 매일 꿈속에서 엄마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것을 다짐한다. 엄마가 어릴 적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

 

책 뒷부분 윤성희 작가님의 인터뷰를 보면 이런 대목이 있다.

 

 
"저는 ‘상실 후 그 사람에게 남은 마음에 집중’하지는 않아요. 그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소설도 물론 좋지만 그보다는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애를 쓰는지 그 과정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중략) 이 인물은 이런 상처가 있지만 이런 태도로 세상을 살려고 해, 라고 생각해야 인물이 움직이는 것 같아요."
 

 

가령 짝짝이 양말을 신는다거나, 꽈배기 이모가 스크류바 노래를 부른다는 것. ’나‘의 엄마가 마치 양말이 한 켤레인 것처럼 '나'가 신던 짝짝이 양말을 매일 신고 매일 빨래하는 것처럼.

 

작가의 이런 의도 덕분인지 소설에서 죽음은 그리 무겁게 다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전반적인 분위기는 어딘가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덕분에 남겨진 마음보다는 그 이후의 삶, 자연스레 흘러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희망도, 따스함도, 다정함도, 무른 마음도 발견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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