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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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겨울, 일을 그만뒀다.
엄밀히 따지면 무언가를 두 번이나 놓아버린 셈이었다. 아닌 걸 끊어내면 마냥 후련할 줄 알았는데, 끈질기게 붙들지 못했던 무력한 손은 떳떳함 대신 미약한 불안을 쥐었고, 그게 나를 참 작아지게 만들었다.
알지도 못할 해답의 실체를 가늠하며 마음은 어지러웠는데, 하늘에선 눈이 내렸다. 그 해 첫눈이었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눈발은 차갑고도 아름다웠다.
뭐가 그리 불안한지 이것저것 챙겨 담아 무거워진 짐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강릉행 열차에 올라탔다. 철도 위의 나는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데 정작 마음은 한 곳에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았다. 잠깐의 머무름인지, 멈춤인지, 자유를 갈망하는 결박인지는 나조차도 알 수 없었다.
약 두 시간 반을 달려 마주한 강릉 바다는 한없이 푸르렀고, 너무나도 아름답고 웅장해서 나를 압도하는 것만 같았다. 이 파도가 나를 집어삼켜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쓸려간다면.
그렇게 나를 집어삼키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은 내가 시계 초침을 보지 않는 찰나가 되었고, 영원할 것 같은 그 찰나 동안, 짓누르던 상념의 무게는 모래알이 되어 발 끝자락에서 파도와 함께 사라졌다.
부드럽고 축축한 해변가에 앉아 글을 썼다. 처음에는 써 내려가는 것을 머뭇거렸다. 나를 위해 글을 쓴 적이 언제쯤이었나. 그렇게나 글 쓰는 것을 좋아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쓰기를 망설였다. 마음이 가난해져서 꺼낼 것이 없었다. 희망의 부재였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썼다. 쓰다 보니 모든 걸 소진한 줄 알았는데 일말의 용기가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종이 끝에 마침표를 찍었다. 철썩이는 파도가 몇 번이고 나를 불러댔다.
그 뒤로는 모든 게 쉬웠다. 여행지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먹었고, 내가 원하는 곳에 가서 내가 원하는 커피를 마셨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었던 풍경을 마음껏 눈에 담았고, 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의도치 않게 아름다운 광경의 최초 목격자가 되기도 했고, 평소 하지 못 했던 생각들이 떠오르며 여러 감정들이 오고 가곤 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모든 건 머무르지 않고 또 다시 흘러갔다. 모든 게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최근에는 혼자 경주 여행을 다녀왔다.
하고 있는 일 특성상,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했는데 그게 내게는 꽤 많은 에너지를 쓰는 일이 되곤 했다. 여느 때처럼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했는데 마침 쉴 수 있는 날이 생겨 전날 곧바로 열차표를 끊었다.
딱히 계획은 없었다. 그저 많이 걷고 오래 침묵하고 싶었다. 계획이 없어서 천천히 걸을 수 있었고 느릿한 걸음 덕분에 나무를 오래 올려다볼 수 있었다.
경주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언제 어디서든 자연을 바라볼 때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 사이를 걷고 있으면 자연을 넘어서서 우주와 연결된 기분이 들고, 그러면 내가 가진 이 모든 마음의 짐과 문제들이 하등 쓸모가 없어진다.
강릉에서 바라보았던 바다와는 또 다른 찬란함이 나를 북돋았다.
대릉원 사이를 한참 걷고, 또 걸었다. 따뜻한 햇빛과,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이 좋아서 대뜸 잔디 위에 앉았다. 챙겨온 책을 한참 동안 읽어 내려가다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 위로 환희와 기쁨이 도드라졌다.
소품샵에서 산 엽서를 꺼내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마구 적어 내려갔다. 혼자 여행할 때마다 나는 꼭 펜과 종이를 챙겨 가거나, 여행지에 있는 소품샵에서 노트를 구매해 무언갈 적는다. 그게 무엇이 되든 상관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써도 좋고, 일기를 써도 좋고, 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기도 한다. 때로는 조금 부끄럽고 우스꽝스러운 글일 수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여행지에서는 알 수 없는 용기가 자라난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꽤 많은 행복이 도사리고 있고, 보다 구석구석 느낄 수 있다.
내가 머물렀던 숙소는 황리단길과 조금 동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차를 타고 굽이굽이 들어가야 하는 외진 곳에 있었는데, 택시비를 감수하고도 이 숙소를 선택한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나를 반겨준 건 사람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는 귀여운 고양이들과 마당의 푸른 잔디와 흙, 그리고 바람의 입김에 한 번씩 떨곤 하는 종의 울림. 방에 들어서자마자 LP판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음악소리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숙소 사장님은 내게 턴테이블 이용법을 친절히 알려주실 만큼, 미소가 따뜻하고 다정하신 분이었다. 부랴부랴 짐을 챙겨 퇴실하던 내게 잠깐 머물다 가라며 공용공간(숲속의 카페 같았다)에서 그녀가 직접 깎은 사과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주시기도 했다.
자세히 보니 비닐하우스 안에 카페처럼 공간을 만드신 거였는데, 나무 테이블과 나무 의자, 그리고 여행과 관련된 책들로 빼곡히 채워진 책장은 이 공간을 자연의 한 일부처럼 보이게 했다. 스피커에서는 재즈가 흘러나왔고, 사장님이 내려주신 커피를 마시며 그곳에 널린 책을 마음껏 읽었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비닐하우스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너머에는 어제 봤던 고양이가 엉덩이를 씰룩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이렇게나 완벽하고 행복할 수 있을까.
이제는 혼자 여행하는 것이 가장 큰 취미가 되었다. 현실의 도피라는 단어에 스스로를 가두며 괴로할 때 즈음, 다시 돌아올 품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내게 혼자 여행하는 것이 외롭지 않느냐 묻는다면, 나는 단언컨대 가장 충만한 시간이라 말할 수 있다. 혼자서 낯선 곳을 여행하는 은근한 들뜸과,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는 편안한 침묵, 그리고 오래토록 목도할 수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 나를 채운다. 소란한 마음이 서서히 고요해진다.
[최유정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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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웃음
- 2024.11.05 21: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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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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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정
- 2024.11.22 16:5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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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웃음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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