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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연극 <아이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대한 재난 앞에 선 개인은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으며, 또 어떤 행동을 취해야만 하는가. 이건 가능성과 책임에 대한 문제다. 순식간에 삶을 무너뜨리는 재난 앞에 선 개인이 쥘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고, 짊어져야 할 책임은 또 무엇일까.

극단 돌파구의 연극 <아이들>(루시 커크우드 작, 전인철 연출, 상명아트홀 2관, 2026.05.21.~05.30.)은 발전소 사고라는 재난 이후를 다루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사고 자체가 아니라 사고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며, 사실 우리 모두는 사고가 벌어진 이후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등장하는 세 명의 인물 역시 우리 주변 어딘가에서 볼 법한 보편적인 인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들이 겪는 공포와 고통의 진폭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후의 세계
배경은 은퇴한 핵물리학자 부부 '헤이즐'과 '로빈'이 함께 사는 작은 집이다. 둘은 과거 자신들이 건설을 도운 발전소가 무너진 이후, 출입 금지 구역에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해안가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야기는 로즈의 방문에서부터 시작된다. 두 사람의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로즈는 오랜만에 만난 헤이즐과 안부를 묻고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 이면에는 묘한 긴장감과 불안함이 켜켜이 쌓여간다.
오랜 친구와 만날 때면 으레 그러하듯 과거에 대한 향수가 가득 담긴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임에도 왜 이토록 날카로운 분위기가 느껴질까. 이 연극이 '재난 이후의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발전소 사고라는 커다란 재난을 온몸으로 겪은 이들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으며, 그 사건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다.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이 상황은 두 사람 모두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로즈와 헤이즐은 28년간의 공백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을 주고받는다. 하지만 그들이 선 장소는 발전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해안가다. 방사능의 위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그 공간 안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 속에는 중간중간 방사능에 대한 두려움과 사고에 대한 거북함이 묻어난다. 그러던 와중, 로빈이 등장한다.
로빈이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세 사람의 관계는 한층 더 복잡다단한 국면을 맞는다. 과거 로즈와 로빈이 사랑을 나누었고 헤이즐 역시 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시간이 흘러 모두가 60대가 된 지금까지도 이들 사이에 불안한 기류를 형성하게 만든다. 이처럼 연극 <아이들>은 외적으로는 '원전 사고 이후'라는 거대한 재난을 배치하여 극적 긴장감을 형성하고, 내적으로는 '사랑'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을 끌어와 인물 간의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결국 이 작품은 두 개의 축이 지탱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건 바로 재난 이후의 세계를 조망하는 거대 서사와 그 속에 흔들리는 사람 간의 관계를 다루는 미시 서사다.
그렇게 두 축이 부딪히면서 이야기는 계속 전진해 가지만, 결국 그 끝에 남는 것은 재난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야만 하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다.
로즈의 방문
작품의 전환점은 로즈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된다. 헤이즐과 로빈, 그리고 관객들까지 가장 궁금해할 질문은 바로 "그래서 로즈는 이들을 왜 찾아 왔는가?"이다.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고 무려 28년 만이다. 로즈가 헤이즐과 로빈을 찾아온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로즈는 고백한다. 자신은 다시 발전소로 돌아갈 것이라고.
돌아가서 사고를 수습할 거라고. 로즈는 지금 그곳을 수습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너무 어린 아이들이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어서 로즈는 이미 발전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숙련된 기술자들을 모으고 있으며, 과거에 함께 발전소에서 근무했던 동료들도 함께 할 예정이라고 말한다.
헤이즐은 지금 자신에게 죄책감을 주입하는 거라면서 분노한다. 헤이즐에게는 가족이 있고 자식이 있다. 책임져야 할 존재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헤이즐은 그러나 발전소 사고에 있어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게 세 인물은 재난 이후에 선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책임과 가능성의 무게를 두고 치열하게 부딪힌다.
도망칠 곳 없는 세계 속에서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그들은 그 끔찍한 사고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때가 있었을 것이다. 사태를 외면하고 모르는 척 행복하게 살고 싶은 순간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는 세계는 어디에도 없다. 이는 연극 <아이들>의 무대 구조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재현되는 듯 보인다. 이 연극은 백스테이지가 없는 구조로, 무대를 둘러싼 삼면이 모두 가로막혀 있으며 오직 객석을 바라보는 제4의 벽만이 열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대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소품들은 무대 아래에 배치되며, 필요한 상황마다 배우가 직접 무대 아래로 손을 뻗거나 아예 무대 밑으로 내려와 가지고 올라가기도 한다.
퇴장 역시 마찬가지다. 셋이서 마주 보며 팽팽하게 대화를 나누던 중 특정 인물이 퇴장해야 할 때마다 배우는 백스테이지로 나가는 대신 무대 아래로 내려가 관객석에 앉는다. 그리고 관객과 같은 위치에서 무대 위 인물들을 지켜본다. 이렇듯 무대 위에 오른 100분간의 러닝타임 동안 배우들은 관객의 시선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배우가 객석에 함께 앉는 행위 자체가 주는 울림도 있지만, 더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무대 위의 인원수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성에 관한 것이다.
무대 위에 로즈와 헤이즐만 있을 때 보이는 팽팽한 신경전은, 로빈이 합류했을 때 사랑과 질투, 그리고 기성세대의 책임감이 뒤엉킨 복잡한 삼각 구도로 확장된다. 그리고 거기서 로빈이 빠지거나 헤이즐이 빠질 때마다, 즉 무대 위에 남겨진 인물들의 조합이 바뀔 때마다 그들이 숨겨둔 민낯이 새롭게 드러난다. 과거 연인이었던 로즈와 로빈이 남겨졌을 때 드러나는 감정, 부부인 헤이즐과 로빈이 남겨졌을 때의 현실적인 대화 등, 셋이 함께 무대에 오를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시각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읽혔다.
그렇게 변해가는 관계 속에서도 변치 않는 단 하나의 사실이 있다. 그들은 이 재난으로부터 끝까지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에는 스스로가 짊어진 책임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가능성을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남아있을 아이들을 위해
연출은 거대한 재난을 겪은 인간은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해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의 미래를 이야기하기보다 농담을 하고, 과거를 떠올리고, 사랑받고 싶어 하고, 자신의 삶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연약하고 이기적인 존재"라고 표현했다. 연출의 말과 연극을 보면서 떠오른 책 한 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체르노빌의 목소리>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는 체르노빌과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한 책이다. 그리고 작가는 이 책이 체르노빌이 아닌 체르노빌의 세계에 관한 것이며, 자신은 소위 기록되지 않은 역사, 그리고 지구와 시간 속에서 사라져 버린 우리의 흔적을 다루려고 했다고 밝힌다. 서두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가끔 내가 미래를 쓰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포스러웠던 것은 우리는 생각보다 쉽게 잊는다는 것이었다. 체르노빌에 파견되었던 한 사람은 거기서 돌아온 후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그때를 떠올렸는지 아냐고, 겨우 며칠만 생각하고 그것으로 끝이었다고 밝힌다.
극단 돌파구 제공 ©김신중, 김보연
재난은 금방 잊힌다. 재난에 대한 이미지만 남을 때도 많다. 그 뒤에서 묵묵히 사고를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주목하지 않는 사회. 재난 이후에 대한 부재가 가득한 세계. 연극 <아이들>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애써 외면해 온 그 '부재'를 다시 직시하며 자신의 책임과 가능성을 짊어지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미래 세대를 위해.
우리는 늘 사고가 벌어진 이후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지금 딛고 선 평범한 일상 역시 누군가의 수습과 책임 위에 유지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재난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다음 세대에게 유예되고 있을 뿐이다. 연극 <아이들>은 이제 무대를 넘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남긴다. 당신은 다가올 내일, 그리고 남아있을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느냐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