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늘 우리 곁에 있었지만 제대로 귀 기울이지 못했던 이야기 [도서/문학]

소설 『초파리 돌보기』가 그리는 여성의 돌봄 노동과 세대 간 연대의 첫걸음
글 입력 2022.04.22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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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겐 역시 딸이 필요하다’ ‘딸은 엄마가 낳은 평생 친구다’

 

누군가의 딸로 살아오면서 정말 많이 들어 왔던 말들이다. 사회적으로, 또 가족과 친척들에게 요구되어온 ‘딸’의 모습은, ‘아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혹은 이해할 필요가 없는 엄마의 삶 속 모든 고통과 감정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는 존재였다.

 

‘때론 ‘남편’ 같고, 때론 ‘친구’ 같고, 심지어 때론 ‘엄마’ 같은 딸’에 대한 요구를, 어쩌면 당연하게도 나는 충족시키지 못했다. 그렇기에 언제나 ‘나쁜 딸’이라는 자각으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런 요구들에 맞서고 싶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칠 때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이 모든 것이 엄마 때문이라는 미운 마음이 쌓여 가기도 했다.

 

성격도, 취향도, 생각도 모두 다른 서로임에도 딸이라는 이유로 받았던 이러한 요구들은 여전히 내 주변을 맴돌며 미움과 애정, 죄책감과 연민, 공감과 외면 등 복잡하고 양가적인 감정과 태도를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딸로서 가지는 애정과는 별개로,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세대와 개인을 넘어 여전히 큰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딸로써 엄마에게 가졌던 복합적인 감정 이면에는 젠더 규범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성 예찬 혹은 모성 신화 뒤의 여성 억압과, 돌봄 노동을 여성의 역할로 규정하는 젠더 규범은 세대를 넘어 엄마의 일상뿐 아니라 내 일상 속에도 스며 들어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엄마가 아무런 보수와 인정 없이 ‘당연하게’ 수행하도록 요구 받은 돌봄 노동의 수혜자이자 방관자였고, 반대로 엄마가 체화한 젠더 규범은 나의 행동과 태도를 억압하기도 했다.

 

이렇게 내가 경험해 온 엄마와 딸의 관계는 참 여러가지 감정과 사연, 피해와 가해가 뒤얽힌 늘 어렵고 복잡한 것이었다. 물론 세상에는 수많은 엄마와 딸의 모습이 있고, 그 관계를 개인의 경험만으로 일반화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경험이 단순히 나 혼자만의 경험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개인의 이야기로 돌아보는 가정과 노동 시장 속 ‘여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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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작가의 소설 『초파리 돌보기』 속에도 평생 돌봄 노동을 해 온 여성 ‘원영’과 그의 딸 ‘지유’가 등장한다. 원영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노동 시장과 가정 내에 존재하는 젠더 질서와 규범이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아주 조금은 들여다 보인다.

 

 

원영은 1978년 가발 공장 취업 이후 외판원, 마트 캐셔, 초등학교 급식실 조리원,

볼펜 부품을 조립하는 부업 등을 거치며 쉬지 않고 일해 왔다.

그럼에도 '오십대 무경력 주부'로 취급되었다. - p. 10.

 

원영은 자기 일을 갖고 싶었다.

집을 갖고 싶다거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여느 사람처럼 그랬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삼십삼 년 동안 그랬다. - p. 11.

 

 

원영은 가정 내에서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을 도맡아 하며,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해 왔다. 그러다가 텔레마케터 일을 시작하며 그동안 정말 가지고 싶었던 자신의 책상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업무 중에 계속 마주하는 혐오와 폭력으로, 원영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떠나게 된다.

 

그 후 원영은 텔레마케터 일을 하다가 알게 된 동료 ‘미선’의 소개로 과학기술원에서 실험용 초파리를 돌보는 일을 시작한다. 그 일은 원영이 가정 내에서 해왔던 돌봄 노동과 비슷한 업무였다. 원영이 길러낸 초파리는 세계 각지로 보내져 실험에 사용되었고, 다양한 연구 성과를 냈다. 하지만 커다란 성과에 비해 원영의 업무가 가지는 존재감은 너무나 작았고, 원영이 했던 업무는 정권이 바뀌고 지원이 끊기자 너무 쉽게 사라져 버린다.

 

이는 지금도 여전히 평가절하 되는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의 위치와도 닮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노동들은 가부장제가 만들어 놓은 젠더 질서 아래 오랫동안 ‘여성의 것’으로 여겨져 왔다.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은 아주 조금씩이나마 가정의 영역을 벗어나려 하고는 있지만, 시장과 사회에서 돌봄 노동과 감정 노동은 여전히 젠더 규범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원영은 애정을 가지고 노동에 임한다. 그는 딸인 지유와 자신의 남편을 자신보다 늘 우선으로 하며 그들을 위해 희생한다. 또 지유가 만류해도 지유의 글을 꼼꼼히 모아두고, 초파리 연구의 성과를 보도한 기사들을 정성스레 스크랩하며 보람을 느낀다. 그러나 원영의 노동은 그가 노력과 애정을 쏟은 만큼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애정이나 보람과 별개로, 노동의 가치가 평가절하되고 기존의 규범이 재생산 되는 상황에서, 개인은 상처 입고 병 들어 간다. 심지어 그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원영은 다른 이야기도 들려줬다.

텔레마케팅 사무실에서 헤드셋 너머로 종일 욕설을 듣는 여자 이야기.

평생 자기 책상을 가져 보지 못해서 아프기 시작한 여자 이야기.

식기세척기를 구입하면 어떻겠냐고 물으면서도 책상이 필요하지 않으냐고는

한번도 묻지 않는 가족 이야기. 밀가루가 체질에 맞지 않아 늘 위무력증에

시달렸지만 남편이 국수를 좋아해서 삼십 년 동안 국수를 먹은 여자 이야기.

체할 때마다 그러게 왜 국수를 먹느냐고 다그치던 딸 이야기.

그러면서도 일요일 저녁이면 와, 국수다, 라며 손뼉을 치던 딸 이야기.

 

p. 29.

 

 

소설 속에서 지유는 원영이 아픈 이유를 초파리를 돌보던 실험실 때문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원영이 쏟아 놓는 여러 이야기 속에서, 원영에게 복합적이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억압과 폭력 모두가 그를 병들게 했던 이유였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노동자로서 원영도, 주부로서 원영도 많은 희생을 요구 받았지만, 원영의 무해함(그리고 안타깝지만 어쩌면 무력함)과 평범해 보이는 가족의 일상 속 그의 돌봄 노동은 가려졌다. 하지만 원영이 일생 동안 해온 모든 것들을 희생과 피해의 결과로만 보며 안타까워하는 것도, 원영의 노동 뒤에 가려진 젠더 질서와 억압을 지우는 것도, 그의 삶과 노동 자체를 존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세대를 넘어 더 많은 ‘원영’가 ‘지유’가 아프기 전에, ‘돌봄’의 가치를 똑바로 마주하고 가정과 노동 시장 속의 젠더 규범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야 한다. 누군가의 희생과 착취로 유지해 온 구조에서 벗어나 공동체 속 개인의 노동과 가치가 온전히 인정될 때, 건강한 개인도, 건강한 사회도 이뤄갈 수 있다.

 

 

 

여러 세대를 걸쳐 연결되는 여성들의 삶에 귀 기울이기


 

원영의 이야기는 어쩌면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라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이야기 속 개인의 삶을 가로지르는 젠더 권력과 규범은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여전히 우리 일상 속에서 억압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

 

아무리 우리 곁에 있는 이야기라도 제대로 드러나지 않아 왔기 때문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 실제로 원영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지유에게 다 털어놓으며 후련함을 느낀다.

 

 

원영은 너무 사소해서 오히려 무시했던 일화들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어내다시피 한 이야기지만 속이 후련했다.

 

p. 29.

 

 

소설은 크게 원영과 지유의 이야기로 나누어져 진행되는데, 두 사람은 각각 원인 모를 병과 건망증에 시달린다. 원영은 온몸의 털이 빠지고 5월에도 집안에서 겨울옷을 입어야 할 만큼 몸이 약해진다. 지유는 공기청정기 브랜드와 동료 작가와의 약속장소를 헷갈릴 정도로 심각한 건망증을 보인다. 지유는 원영의 생일을 잊었다는 미안함에 3년 만에 원영의 집을 찾아가 원영의 상태를 알게 되고,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해 처음으로 원영의 이야기를 물어본다.

 

 

지유는 원영에게 매일 전화를 걸었다. 함께 일했던 동료의 이름이 뭐였냐는 둥,

실험을 주도했던 교수는 누구였냐는 둥 물었다. 지유는 원영을 닦달했다.

잘 기억해보라고, 잊고 있는 것이 분명 있을 거라고 했다.

(..) 

"이상한 건 없었다니까"

없는 얘기를 지어내려는 지유가 원영은 탐탁지 않았다.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을 문제가 있는 것처럼 쓰면 안 된다고 여겼다.

초파리 실험동은 원영의 꿈이 이루어진 곳이었다.

어째서 지유가 나쁜 방향으로 이 이야기를 쓰겠다고 고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p. 27.

 

 

두 사람은 각자가 앓는 증상처럼, 비슷하면서도 다른 아픔을 겪으며 삶을 이어왔다. 이는 단지 엄마와 딸의 관계뿐만 아니라, 세대를 넘어 공유된 억압 속에서도 나름의 변화를 거듭해 온 여성들 각각의 삶과 닮아 있다.

 

여성이라는 위치가 개인의 정체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세계에 살아 온 각기 다른 세대의 여성들은 억압을 견뎌온 경험과 그 아픔으로 연결된다. 원영과 지유가 결국 서로의 아픔 때문에 소통을 시작하게 된 것처럼, 그 아픔은 세대를 넘어 여성들이 서로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하지만 닮은 듯 다른 서로의 아픔을 어떻게 다루어 낼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이며, 앞으로 더 많이 이야기하며 함께 풀어나갈 숙제다.

 

서두에 언급했던 엄마와 딸의 관계처럼 복합적인 관계를 맺어온 각 세대의 여성들은 부채감과 연민, 공감과 외면, 존경과 무시가 묘하게 엇갈리는 지점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공감을 넘어 서로에 대한 존중과 연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서로의 이야기를 묻고 듣는 것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영원과 지유가 그랬듯 말이다.

 

원영이 원했던 ‘해피엔딩’은 우리 각각의 삶에서 아직은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서로의 아픔을 알아봤던 우리가 다음에는 아픔보다 더 다양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여러 세대를 걸쳐 존재하는 모든 ‘원영’과 ‘지유’가 더는 아프지 않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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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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