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삶에 원하는 것이 너무나 많은 별종 멕시코 딸의 이야기 -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완벽한 멕시코 딸은 이제 없다
글 입력 2022.02.12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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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하게 굴려고 애써도 그게 안 된다.

규칙에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자 완벽한 멕시코 딸은 천생적으로 불가능한 듯한 ‘훌리아’는 항상 부모님의 속을 썩이는 ‘별난 자식’이다. 훌리아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이름 하여 ‘규칙 알레르기병’.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그 어떤 제한과 규제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는 말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녀 스스로도 착한 딸이 되어보려 무던히 노력해보아도 그러한 순종적인 행동에 마치 알레르기라도 있는 것 마냥 한없이 우울해지다가 결국 자살 기도까지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부모님은 ‘완벽한 멕시코 딸’에 부합하는 언니 올가와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그에 빗나가는 훌리아를 마치 변종, 돌연변이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훌리아는 항상 방을 감시당하고 사소한 약속, 외출 하나하나까지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런 부당함을 절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는 훌리아의 몸에 그것들은 독소가 되어 차곡차곡 쌓여갔다. 훌리아가 항상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을 지닌 것처럼 묘사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훌리아가 세상에 대한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 놓을 때마다 그녀의 주변인들은 언제나 ‘너는 너무 까다롭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지만, 나는 그녀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어쩐지 마음 한자락에 동여 매여 있던 매듭이 풀리는 느낌, 오래 묵은 체증이 한번에 탁- 하고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훌리아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용기는 없지만 그녀만큼이나 이 세상에 불평이 많은 사람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훌리아가 멕시코에서 태어난 유색인종 여성이기에 느껴야 했던 불편함은 객관적으로 따져 보았을 때 매우 부당하기 이를 데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훌리아를 놓고 ‘예민한 아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이상하리만치 말이다. 그렇다면 왜일까? 왜 올가는, 어마는, 티아들은, 나아가 멕시코 여성들은 그에 순종하고 마치 ‘순리’를 따르듯 반향 한번 일으키지 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어쩌면 그들이 너무 부당한 규칙에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이치로 여길만큼 길들여졌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구간의 가축은 어찌하여 단 한번도 탈출을 시도하지 않을까? 간단하다. 날때부터 마구간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자란 그들은 마구간을 나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다. 멕시코 여성들은 ‘멕시코 여성’이라는 틀 안에 갇혀 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몸에 맞지 않는 틀을 벗어 던지려는 훌리아의 어떻게 보면 당연스러운 행동은 그녀를 별난 아이, 엇나가는 아이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난 너무 많은 것을 원해서 가끔은 정말 견딜 수가 없어요.

폭발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훌리아는 왜 여느 멕시코 여성들처럼 지루하기 짝이 없지만 굴곡 없는 순탄한 삶을 살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 답은 다음 대목에 던져지는 그녀의 외침 속에 있다. 훌리아는 원하는 것이 너무 많다. 자신의 삶을 놓아버리고자 자살 기도까지 했던 훌리아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삶에 대한 대단한 열정을 지녔다. 그녀가 원하는 그 무엇도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지가 굳어버린 동상처럼 살아가는 것은 그녀에게 ‘삶’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사실 훌리아가 바라는 것은 그다지 발칙할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다. 아름다운 자연이 내다 보이는 곳에서 커피 한 잔을 하며 책을 읽고, 때로는 햇살을 받으며 마음껏 글을 쓰는 것, 그리고 그 글을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것. 그러나 이 간단해 보이는 그녀의 바램은 ‘멕시코 딸’이라는 틀 안에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멕시코 딸은 언제나 가족과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했고, 멕시코 어머니가 되서는 하루종일 토르티야를 만들거나 청소를 하거나 해야 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일과 같은 예술은 멕시코 딸에게 사치라고 여기는 집에서 훌리아가 단 한순간도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은 너무나 명백한 이치이다. 완벽해 보였던 멕시코 딸이자 훌리아의 친언니 올가가 죽은 후, 훌리아가 올가의 삶에 의문을 품었던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훌리아는 언제나 언니 올가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청춘의 몸에 갇힌 할머니 같은 따분한 삶을 살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었고, 올가의 방에서 발견한 그녀의 의뭉스러운 죽기 전 행적은 그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었다.


어쩌면 올가도 ‘완벽한 멕시코 딸’이 되기에 자신의 삶이 너무 아까웠기 때문에 그토록 희망 없는 기약을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책에서 묘사되는 ‘멕시코 딸’의 삶은 그 누구에게도 삶에 대한 타오르는 불씨 같은 열정을 피워낼 수 없을만큼 버석버석한 것이었다. 어느 누가 완벽한 멕시코 딸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의 삶에 대한 단 한점의 기대도 없는 사람이 아닌 이상 말이다.

 

 

 

‘내 삶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너무 무섭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이다. 훌리아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삶을 쟁취해냈다. 자기 자신을 가둬 둘 수 밖에 없었던 시카고를 벗어나 뉴욕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수 있는 포문을 열었다. 그러나 훌리아를 지배한 감정은 오롯한 기쁨 뿐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기쁨보다도 두려움이 앞장서 그녀를 덮쳤다. 모든 것은 급류 위에 뜬 조각 배처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변해갔고, 그 방향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지만 이정도의 속도를 원한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슬프지만 그녀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훌리아가 올가, 어마, 나아가 아바의 몫까지도 살아내겠다는 결심을 한 것은 그녀도 짐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것은 너무나 짜릿하고 멋진 일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좋든 싫든 좋아지든 나빠지든, 모든 것은 변한다. 그 사실이 가끔은 아름답고 가끔은 무섭다. 때로는 아름다우면서도 무섭다.’

 

도서 <나는 완벽한 멕시코 딸이 아니야> P. 375 中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온전히 나 자신을 찾아가는 훌리아의 여정은 아마 이제부터 시작일 것이다. 그녀는 분명 눈부신 삶을 살 것이지만, 그만큼 고통스럽기도 할 것이다. 그녀가 지긋지긋하게 여기던 이전의 삶은 분명 끔찍했지만 때로는 포근하고 안정적이었을 것이지만 그녀가 새로 개척해 나갈 길은 아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은 비포장 도로일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그렇기에 훌리아의 삶은 그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컬처리스트 명함 (1).jpg

 

 

[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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