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뤄지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웠던, '8월의 크리스마스' [영화]

시한부 인생에 접어든 한 남자의 일상을 그리다
글 입력 2021.11.2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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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의 첫 데뷔작인 <8월의 크리스마스>(1998)는 한국 멜로영화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 이는 시한부 인생에 접어든 한 남자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어 호평을 받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진사 '정원'과 주차요원 '다림'의 역할로는 당시 뜨거운 인기를 자랑하던 한석규와 심은하가 출연함으로써 더욱 큰 화제를 모았다.

 

감독은 환하게 웃고 있는 고 김광석의 영정사진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쓸쓸하고 고독한 죽음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느낀 것이다. 이에 따라 죽음을 앞둔 사진사가 자신의 영정사진을 찍는 설정을 집어넣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남녀의 사랑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담은 깊이 있는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바라본 <8월의 크리스마스>의 특징들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초원 사진관'의 사실적 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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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는 정원이 운영하는 '초원 사진관'이다. 극 중 구청에서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다림은 불법 주차 차량의 번호판 확대를 위해 매번 정원의 사진관을 찾는다. 둘은 사진 작업이 끝나는 걸 기다리는 동안 서로에 대한 질문과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더욱 가까워진다. 이처럼 초원 사진관은 두 남녀의 첫 만남이 이뤄지는 장소이자 둘 사이가 긴밀해지는 장소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초원 사진관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있다. 바로 실존하는 사진관이 아니라 군산의 한 차고를 개조한 세트장이라는 점이다. 분명히 인공적으로 건설된 세트장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꾸며진 듯한 느낌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는 이야기의 배경인 아담하고 소박한 동네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날로그적인 간판을 달았고, 낡고 오래된 소품과 가구들을 배치했다. 여기서 옛날식으로 사진을 작업하는 정원의 모습은 그 당시의 풍경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이와 같은 사실적 재현은 주요 장소의 현장감을 더함으로써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인물의 움직임에 집중하는 촬영기법


 

영화는 카메라를 고정한 후 풀샷으로 잡아 특정 인물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장면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때 인물은 화면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오가며 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간의 경과를 나타낸다.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졌던 건 다림이 불이 꺼진 초원 사진관 앞에서 정원을 기다리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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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호송된 정원은 며칠 동안 초원 사진관을 닫게 된다. 첫 데이트 이후로 소식이 없는 정원에 불안함을 느낀 다림은 사진관 앞을 서성인다. 화면은 텅 빈 사진관에 고정된 채 다림의 움직임에 집중하도록 한다. 다림은 가만히 서 있다가 화면 밖으로 사라져 보는 이로 하여금 호기심과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그렇게 궁금증이 커질 즘에 다시 돌아온 그녀는 창문에 돌멩이를 던진다. 이때 장면이 전환되며 깨진 창문 너머로 울먹이는 그녀의 표정을 비춘다.

 

이처럼 고정된 구도에서 한 인물의 움직임을 보여주기에 그의 말과 행동에 더욱 집중하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에 더해 포커싱한 장소의 뒷배경이 변함에 따라 시간의 흐름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장면 외에도 곳곳에 사용된 롱테이크는 영화를 긴 호흡으로 끌고 가는데 탁월하게 작용했다. 이를 통해 전지적 관찰자 시점으로 정원을 따라가며 이야기를 찬찬히 머금을 수 있었다.

 

 

 

재조명한 시한부 환자의 일상


 

정원의 일상 곳곳에 스며든 죽음의 향기가 화면 너머에도 전달된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그의 생각과 감정들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다. 수시로 약을 먹고, 한숨을 내쉬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통해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시한부 환자라고 해서 그의 일상이 송두리째 바뀌는 건 아니었다. 한때는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며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죽음이 가까워지자 관조적인 태도를 보인다. 아버지에게 전해드릴 비디오와 현상기 작동법을 작성하고, 다림의 사진을 액자에 걸어놓고, 자신의 영정사진에 사용될 사진을 직접 촬영하는 등 담담하게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한 정원의 죽음은 환히 웃고 있는 영정사진을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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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은 시한부 환자인 정원이 곧 닥칠 죽음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신, 사랑하는 이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독백을 들려주는 걸 택했다. 이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깸으로써 생의 마지막 순간이 아프고 힘들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아름답게 완결지은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


 

결말부에 나오는 정원의 독백은 다음과 같다.

 

 

"내 기억 속의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 추억으로 그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다는 말을 남깁니다."

 

 

정원은 삶의 끝자락에서 만난 마지막 사랑이자 간직할 추억인 다림, 그녀 덕분에 웃으며 떠날 수 있었다. 둘의 사랑은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끝났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게 완결되었다. 만약 정원이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고백했다면, 다림은 그를 그리워하며 평생을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세상을 떠나도 여전히 살아갈,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최선의 배려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창 너머로 다림을 지켜보기만 하던 정원은, 마지막이 돼서야 초원 사진관에 그녀의 사진을 전시하고 떠난다. 계절이 지나 이곳에 온 다림은 자신의 사진을 통해 서로가 같은 마음이었음을 알게 되고, 이내 쑥스러운 듯 웃으며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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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크리스마스>는 물에 퍼진 잉크 같은 영화였다. 단 한 방울로도 넓게 번져나가는 잉크처럼 어느샌가 깊숙이 스며들어 진한 여운을 남겼다. 어떤 극적 장치도 없이 시한부 환자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비춤으로써 큰 울림을 주었다. 그저 같은 동네에 사는 사진사 정원과 주차요원 다림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함으로써 오랫동안 기억에 머물도록 했다.

 

특히 삶과 죽음이라는 큰 테마 안에서 '사랑'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강조했다. 비록 세상을 떠난 정원이지만, 그에게는 평생토록 간직할 다림이란 추억이 있다. 그런 면에서 시한부 환자의 삶이 반드시 불행하지는 않다는 걸 담백한 이야기와 섬세한 연출로 잘 전달한 듯하다.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그린, 이뤄지지 않아서 더욱 아름다웠던 사랑을 보여준 <8월의 크리스마스>. 이처럼 묵직한 멜로영화가 다시 관객들 앞에 찾아오길 바라며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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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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