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하나의 사건, 조각난 진실 - 빛과 철

빛과 빛, 철과 철이 부딪히던 밤
글 입력 2021.02.19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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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IEW ***

영화 <빛과 철>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메인 포스터.jpg

 

 

두 여자가 한 교통사고로 남편들을 잃었다. 희주의 남편은 죽었고, 영남의 남편은 2년째 의식불명. 2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희주는 우연히 영남을 맞닥뜨리고, 영남의 딸 은영은 희주의 주위를 의뭉스럽게 맴돈다.

 

하나의 사건, 각자의 이유, 조각난 진실. 빛과 빛, 철과 철이 부딪치던 그날 밤의 비밀이 밝혀진다.

 

**

 

'모두의 비밀이 부서진다'는 문구와 함께 감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세 인물. 영화 <빛과 철>은 포스터부터 인상깊었다. 차가운 눈, 누군가를 원망하는 듯한 눈,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눈들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영화의 내용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고,


 

영화는 한 교통사고로부터 시작된다. 희주의 남편과 영남의 남편이 타고있던 차량이 부딪혔다. 이 사고로 희주의 남편은 세상을 떠났고, 영남의 남편은 혼수상태에 빠져 병상에 누워있다.

 

양쪽 모두에게 큰 후유증을 남긴 사고였지만 남은 가족들은 일상을 살아가야한다. 희주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과거에 일하던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하고 영남도 일터인 공장 급식소와 남편이 입원해있는 병원을 오가며 살아간다.

 

희주가 근무하는 공장은 영남의 일터와 같은 곳이었다. 동선이 같은 둘은 자꾸 우연치 않게 마주치게 된다. 영남과의 대면 자체가 불편해 보이는 희주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영남. 둘의 관계는 마치 사고 가해자와 피해자같았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가해자와 사고에 관해 한 마디라도 듣고 싶은 피해자로 영화 초반에는 둘을 바라봤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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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


 

그런데 영남의 딸, 은영이 희주 앞에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전환된다. 사실 아빠는 죽으려고 했었다는 희주의 말에 희주는 2년 전 교통사고를 다시 되짚어본다. 그리고 재수사를 통해 하나씩 진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마치 맨 위부터 얇은 껍질을 한 겹씩 벗기는 듯한 영화는 관객을 끝까지 모호하게 만든다. 교통사고의 당사자 둘 중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혼수상태이기 때문에 주변 인물들의 말들로 추측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영남의 남편은 교통사고 전, 영남과 함께 일하던 공장에서 허리를 다쳤다. 공장의 안일한 태도와 하청업체의 부실한 대응으로 그는 적당한 보상도 적절한 치료도 받지 못했다. 거동이 불편해지고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그는 칼을 들고 공장에 찾아가기도 했지만 변하지 않는 상황에 절망하며 죽음을 택했을지도 모른다.

 

희주의 남편은 결혼 후 꾸준히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었다. 희주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교통사고가 난 그날도 희주의 오빠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술을 한 잔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절정에서 밝혀지는 트렁크 속 연탄을 본다면 아마 희주의 남편도 죽음을 택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남편들에 관한 정보가 하나씩 드러나지만, 두 사람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이 실제로 죽으려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밝혀지는 사실들을 통해 희주는 그동안 무겁게 품고 있던 죄책감에 대해, 영남은 지고 있던 삶의 무게에 대해 허무함과 회의감을 갖게 된다.

 

억울한 가해자였다는 희주의 분노는 방황하게 되었고, 수사과정에서 피해자였던 영남의 명분도 사라졌다. 이제 둘에게 남은 것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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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부에서 영남의 남편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게 된다. 유일하게 그날 사고 장소에 있었고,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인물.

 

희주와 영남은 병원으로 빠르게 달려다가 사고 장소를 지나던 도중, 도로에 갑작스레 튀어나온 고라니를 마주한다. 아찔한 순간을 함께 한 둘이 길게 서로를 마주본 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 고라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허무할 수도 있는 결말이지만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과거의 교통사고는 희주의 남편도, 영남의 남편도 가해자가 아닐 수 있다. 고라니가 자주 출몰하는 도로였고, 누구의 잘못이 아닌 자연재해같은 사고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은 맘이 편안해졌다.

 

영화가 끝나고 조명이 켜져도 자리에서 쉽사리 일어날 수 없었다. 쉴새없이 몰아치는 영화를 보면서 잔뜩 긴장했는지 어깨가 굳어 뻣뻣하기도 했다. 뛰어난 흡입력과 몰입감으로 관객을 계속 끌고가는 영화였다. 특히 주연인 염혜란, 김시은, 박지후 배우들의 눈빛 연기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정선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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