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재난의 밑바닥과 하늘을 응시하는 시선 - 지금, 만화 6호

글 입력 2020.09.12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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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부터 웹툰은 나의 친구였다. 여러 제약이 따르는 어린이에게 무료인 데다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웹툰만큼 접근성 좋은 콘텐츠는 없었다. <낢이 사는 이야기>로 대학 생활이란 걸 처음 알게 되었고 <치즈인더트랩>으로 관계의 복잡한 속성을 깨달았다. <어서 오세요, 305호에!>로 성 소수자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했고 <연민의 굴레>로 동경과 자기 연민이 얼마나 보편적인 감정인지 느낄 수 있었다. 이렇듯 여러 웹툰이 내 삶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중에 재난만화가 차지하는 부분은 별로 없었다. 앞서 언급된 만화들은 평범한 개인의 일상 이야기로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일로 가득한 재난만화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 생각은 최근에 이르러서 완전히 뒤집혀졌다. 오히려 일상만화가 판타지 같고 재난만화가 일상처럼 느껴져 <지금, 만화>에 담긴 재난만화의 많은 부분이 공감대를 형성했다. 코로나 19라는 변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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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영상진흥원이 지원하는 만화(웹툰) 비평지 <지금, 만화>의 6호 주제는 ‘재난+만화’이다. 여러 편의 재난만화와 사회에 대한 분석이 <지금, 만화> 6호의 내용이다.

 

잡지 첫 번째 기사인 백종성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의 글에서 재난장르와 재난만화의 특징이 정리된다. 글에 따르면 지진, 쓰나미 등과 같은 자연재해뿐만 아니라 좀비, 괴수, 바이러스 등 다양한 요소가 재난으로 기능할 수 있다. 재난장르라고 하면 보통 블록버스터 영화를 떠올리기 쉽지만, 만화 분야에서도 많은 도전이 이뤄졌다.

 

백종성 교수는 재난영화와 재난만화를 미학적 측면에서 구분한다. 움직이는 영상으로 이뤄진 영화는 화려한 시각효과를 통한 스펙터클을 주요 전략으로 취하는 반면, 정지된 장면의 연속인 만화는 스펙터클보다는 개인의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춘다. 세상을 구하는 영웅 대신 당장의 생존이 중요한 개인이 주로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다. 영화에서 묘사하는 재난이 판타지 같다면 만화에서 묘사하는 재난은 절망 그 자체다.

 

우리 삶은 재난만화처럼 좀비도, 거대 곤충도 없다. 자연재해가 있긴 하지만, 세상을 뒤바꿀 정도의 재해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잡지를 읽는 내내 공감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등장하는 ‘코로나 19’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2020년, 재난 속의 우리


  

2009년 영화 <해운대>가 개봉했을 때, 쓰나미가 해운대를 덮친다는 단순하면서도 신선한 소재에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을 선택했다. 내 주변에서도 ‘한국에서 재난 장르는 처음이잖아’라는 반응으로 영화관에 향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땐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몇 년 뒤 맘 놓고 영화관에도 갈 수 없는 진짜 재난이 닥치리라는 걸.

 

영화든 만화든 재난장르를 접할 때마다 실제 우리 삶은 안전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2020년에 와서는 정반대였다. 어떤 콘텐츠를 접하든 마스크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질투심이 타올랐다. 아무리 발악해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지금 우리는 재난 속에 살고 있다.

 

처음엔 금방 지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신천지에 의해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확진자가 폭증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후에도 많은 곳에서 집단 감염이 발생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희생과 노력으로 종식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예전 일상과 한 발자국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이뤄진 2차 대유행 앞에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코로나 19로 이미 알고 있었지만 더욱 더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이 있다. 나는 밖에 나가는 것과 사람 만나는 걸 너무나 좋아한다. 공부도 백색소음이 가득한 카페에서 하는 것이, 영화도 꼭 영화관에서 여러 명과 함께 보는 것이 좋다. 낯선 사람들과 취향을 공유할 수 있는 소모임 역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 중 하나다. 지금에 와서는 모두 불가능해진 것들이다.

 

재난만화 주인공들에게 밖에 나가고 사람들과 접촉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만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재난이 드러내는 세상의 밑바닥


 

그렇다고 재난만화를 코로나 19라는 변수가 없으면 공감하기 어려운 장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만화에서 재난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극적 장치일 뿐, 핵심은 인간 내면의 본질을 다루기 때문이다. 본성을 다루기에 이성적인 판단을 불가능케 하는 재난만큼 적합한 소재는 없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학교를 배경으로 한 <지금 우리 학교는>과 <유쾌한 왕따>이다. 학교는 우리에게 가장 보편적인 장소이다. 멀리서 보면 인재를 양성하는 평화로운 공간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경쟁, 폭력, 서열 등으로 얼룩진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곳이기도 하다.

 

혈기 왕성한 아이를 한 곳에 몰아넣어 똑같은 옷을 입히고 똑같은 생활을 보내게 한다. 거기에 성적으로 줄 세우기까지 한다.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게 더 어불성설인 셈이다. 아이들을 학교에 가두고 혼란과 공포로 몰아넣은 좀비 바이러스와 지진이다. 그러나 만화에서 나타나는 입시나 왕따 문제는 모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이다. 바이러스와 지진은 문제의 원인이 아니다.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린 도구다.

 

재난은 혐오와 차별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태원 클럽으로 확진자 수가 급증했을 때, 거리 두기에 지친 국민들은 분노했다. 몇몇 사람들의 분노는 이성적인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성 소수자 혐오로까지 나아갔다. 좀비 장르에서 불과 몇 분 전까지 동료였던 이를 좀비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생사의 갈림길 앞에서 감염자는 내 목숨을 위협하는 존재일 뿐이다. 재난은 정당성을 부여했(다고 믿)을 뿐, 우리는 모두 특정 집단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행위가 어제오늘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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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국가 전체의 밑바닥까지 드러낸다. 윤태호 작가의 <야후>는 김포공항 폭발물 테러 사건, 86 아시안 게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5공화국에서 6공화국으로의 정권 교체 등 실재했던 사건들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만화는 붕괴하는 건물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기만 해야 했던 아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붕괴의 순간은 잠깐이다. 무너진 건물은 재건하면 된다. 그러나 주인공 김현에게 그날의 사고는 평생 영향을 미친다. 당사자들은 재난이 지난 이후에도 이전의 삶을 살 수 없다.

 

김현은 대통령 직속 수도경비특수기동대(이하 수경대)라는 조직에 들어가 수도경비와 대민지원을 주요 임무로 맡고 수행한다. 그러다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서 압사하는 소녀를 목도하면서 국가의 부패가 재난의 실체임을 깨닫는다.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던 김현은 소녀의 죽음 앞에선 분노를 느낀다.

 

지진, 바이러스와 같이 모든 국민이 피할 수 없는 재난이 있는가 하면 붕괴 사고와 같이 특정 장소에 있는 특정 인물만 겪는 재난이 있다. 중요한 건 그 여파를 당사자가 아닌 이들도 고스란히 받는다는 점이다. 우리가 국가적 재난에 슬퍼하고 혼란스러워하고 분노했던 건 단순히 피해자 수가 많아서만은 아니었다. 발생에서 후속 처리까지 국가의 힘이 개인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느꼈기 때문이다.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의 감염 소식이 씁쓸하게 들리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가 종식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IMF가 남긴 안정적인 직장에 대한 집착처럼 코로나가 남긴 접촉에 대한 공포도 꽤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을 마냥 비관하며 실의에 젖어있을 수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작품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궁리를 모색하는 만화의 주인공들이나 지금, 이 순간에도 고군분투하고 있을 의료진들처럼 말이다.

 

<지금, 만화>를 읽으면서 뭉클함을 느낀 부분이 많았다. <스위트홈>의 고립된 주인공이 밖으로 나가 연대하는 부분이나 <심연의 하늘>의 아이들이 순수성과 희망을 잃지 않는 부분 등이 그랬다. 재난을 이겨내기 위해서 꼭 대단한 초능력이 필요한 게 아니다. 배척과 비관 대신 연대와 희망을 품는 마음이면 된다. 그게 재난을 해결해주진 않더라도 버틸 수는 있게 할 것이다.

 

만화와 현실은 다르다. 만화는 아무리 참혹한 재난이어도 작가가 마침표를 찍으면 어떤 방식이든 끝이 난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건 잠깐의 답답함이 아니라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이다.

 

 

“심연의 끝에서 하늘을 보라.” 알고 보면 스스로에게 하는 말

 

주인공 ‘하늘’은 용기라는 말로는 차마 다 담을 수 없는 선택을 한다. 그토록 수많은 절망을 겪고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그가 ‘하늘’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선 엔딩의 이야기는 끝이지만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다. ‘하늘’과 ‘혜율’은 진짜 하늘을 보게 된 걸까. 드디어 심연은… 절망은 끝이 난 걸까. 이러한 궁금증과 함께 언젠가 다시 이어질 이들의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 P. 80

 

 

우리가 그토록 꿈꾸는 평범한 일상은 쉽게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재난만화를 그리는 작가들처럼 재난에 동요하지 않고 밑바닥과 하늘을 동시에 보는 시선을 지닌다면 일상을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은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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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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