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케스트라로 완성되는 한 편의 영화 -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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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어릴 적 나의 수많은 소원 중 하나였다.
외진 시골 마을에 사는 외로운 아이는 영화 보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그 아이를 먼 영화관까지 데려가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혼자 길을 나설 만큼의 용기도 없던 아이는 여름방학에 참여한 영어 캠프를 통해 처음으로 영화관에 발을 들였다. 인생 처음으로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보았던 그 영화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셉션>이었다.
영화관에 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너무 흥분돼서 내용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영화의 뛰어난 완성도에 금세 매료되어 몰입할 수 있었는데, 보는 내내 커다란 스크린에 압도되던 중 문득 벽면에 붙은 스피커에 시선이 갔다. 영화관에 처음 왔다는 건 영화 사운드트랙의 웅장함도 처음 접했다는 뜻이다.
영화에 대한 식견이 짧았던 그 시절에도 본능적으로 음악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놀란 감독을 비롯한 수많은 거장의 영화들을 접하면서 ‘한스 짐머’라는 이름에 익숙해졌다. 오랜 시간 할리우드 영화의 스펙터클을 책임진 음악 감독 한스 짐머의 경력은 그 자체로 나의 영화 연대기였다.
2024년 11월 10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된 <한스 짐머 영화음악 콘서트>는 WE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훌륭한 연주를 통해 한스 짐머가 40년 넘게 작업해 온 영화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공연이다. 일찍이 영화음악에서 한스 짐머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인식하고 그에 관한 글까지 써 본 나에겐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번 공연에서는 스크린의 활용이 두드러졌는데, 어떤 영화의 어떤 곡을 연주하는지 스크린에 영화 포스터와 제목을 띄워줘서 힘겹게 팜플렛을 확인하지 않아도 편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나의 인생 첫 영화관 경험을 함께했던 <인셉션>은 물론 <다크나이트>, <인터스텔라>까지 한스 짐머에게 상징적인 놀란 감독 영화의 음악을 오케스트라로 듣다니 황홀했다.
놀란 감독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단연 <다크나이트>다.
무정부주의자 조커와 고담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배트맨의 대결이 영화의 주된 내용으로, 기존의 영웅 영화의 공식을 전혀 답습하지 않고 선과 악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한 면이 인상적이었다. 조커로 대변되는 ‘악’을 단순히 없애야 하는 대상이 아닌 배트맨으로 대변되는 ‘선’의 존재 이유로 삼는 영화의 태도가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윤리적인 딜레마를 제시하며 묵직한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다크나이트>를 오랫동안 마음 깊이 품고 있었는데, 영화의 ‘Main Theme’이 연주되는 순간 선과 악이 대립할 때 나오던 긴장감을 느끼면서 내가 얼마나 이 영화를 좋아하는지 새삼 떠올랐다.
<인셉션>의 ‘Time’을 감상한 순간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오랫동안 갈망했던 영화관에서 처음으로 본 영화가 <인셉션>이라는 사실에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훌륭한 시각효과, 긴장감 넘치는 음악이 나의 첫 영화관 기억을 장식했다는 게 영광이었다.
그때 영화에서 음악이 꼭 필요하다는 걸 알게 해준 ‘Time’을 들으며 기분 좋게 향수에 젖었다.
당연히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영화음악만 있는 건 아니었다. 한스 짐머에게 제58회 골든글로브 음악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던 <글래디에이터>의 음악이 나와 무척 반가웠다. 이전에 한스 짐머에 관한 글을 썼을 때 그의 수많은 대표작 중에 골라 특별히 다뤘던 작품이기도 했다.
서기 180년 전쟁 영웅이 주인공인 영화답게 호전적인 전투 장면이 많았는데, 초반부 관객을 압도하는 긴 전투 시퀀스를 장식하는 ‘The Battle’이 연주되었다. <글래디에이터>는 사람들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담긴 작품이라고 생각되는데, 한스 짐머 특유의 웅장한 음악이 없었으면 화려한 블록버스터도 완성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탑건>, <캐리비안의 해적> 등 인상적인 영화음악들이 연주되었다. 특히 <탑건>에서는 전자 기타 소리가 두드러져서 오케스트라 공연에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신선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오래전 친구들과 열심히 들었던 <캐리비안의 해적>의 상징적인 사운드트랙도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그의 음악이 연주되는 것만으로 한 자리에서 현대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영화 계보를 훑는 느낌이었다.
음악도 훌륭했지만, 영화에 따라 영화 고유의 색감으로 조명이 바뀌는 무대 연출도 무척 좋았다. 조명 연출 덕분에 영화음악을 따로 감상하는 게 아니라 해당 영화를 다시 한번 관람하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 받을 수 있었다. 앉아서 감상했을 뿐인데 영화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것 같은 시간이었다.
영화는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관에서 봐야만 영화의 재미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재미를 완성하는 데는 커다란 스크린만큼이나 웅장한 소리도 중요하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처음으로 극장에서 <인셉션>을 본 이후로 영화관에 가지 못했던 유년 시절을 보상받으려는 듯이 안방 드나들 듯 영화관을 찾았다. 그렇게 나는 영화광이자 영화관광으로 성장했다.
한스 짐머는 내 영화 사랑의 시발점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그가 영화를 사랑한 나의 지난 시간에 함께한 순간이 많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진금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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