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의 끝자락, GS칼텍스 예울마루가 아주 특별한 공연을 선보였다. 다른 일자에 GS아트센터에서도 올려진 해당 공연에서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프랑스 애니메이터 그레구아르 퐁이 만나 라이브 드로잉을 음악과 결합한 독창적 장르, ‘시네스테틱스(Cinesthetics)’를 구현해 냈다.
공연의 시작을 장식한 프로코피예프의 <피터와 늑대>는 ‘시네스테틱스’라는 장르에 딱 들어맞는 음악이다. 이 곡은 아이들에게 오케스트라 악기를 소개하기 위해 교육적 목적으로 작곡된 음악 동화로, 명확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다. 프로코피예프가 음악과 각본 모두 직접 썼으며, 단순히 내용에 맞는 음악을 써낸 것만이 아니라, 곡 안에 나레이션을 포함해 음악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구상했다. 덕분에 청중은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음악을 통해 머릿속으로 해당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여기에 라이브 드로잉을 더해 시각적 요소를 자극하니, 작품에 대한 몰입력이 두 배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각 악기군은 저마다 하나의 등장인물을 맡아 연기한다. 재빠르고 가벼운 새는 플루트, 익살스러운 오리는 오보에, 살금살금 다가오는 고양이는 클라리넷이 맡아 표현한다. 이렇게 등장인물에 특정 악기와 선율을 부여하고, 인물 소개와 함께 악기 소리를 들려주며 본격적으로 곡이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정은주 작가의 나레이션과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가 함께하고, 그레구아르 퐁이 재빠르게 각 테마에 맞춰 캐릭터들을 그려내며 작품을 감상하기 전 친절한 길잡이가 되어주었다.
이때 각인된 악기의 음색과 드로잉 속 캐릭터들은 이후 곡의 적재적소에 자연스럽게 겹쳐지며 반가움을 자아낸다. 나레이션과 연주가 교차되어 이어지는 동안 공연장은 어느새 동화 속 세계로 탈바꿈되고, 관객은 그 안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음악과 함께 이어지는 드로잉은 한 캐릭터의 시점에서만 머무르지 않으며, 피터와 동물 친구들이 늑대를 마주하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장면들을 박진감 넘치게 표현한다. 특히 오리가 늑대에게 잡아먹히는 장면에서는 늑대의 얼굴이 눈앞으로 불쑥 다가오듯 확대되고, 오리가 날카로운 이빨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순간이 생생하게 그려져 긴장감을 높였다.
해당 사건은 피터의 입장에서도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끼던 오리를 잃은 피터는 늑대를 잡을 방법을 고안하다가, 굵은 밧줄로 꼬리를 묶어 늑대를 잡는다. 늑대를 잡은 피터는 의기양양하게 늑대를 데리고 마을로 행진한다. 이때 울려 퍼지는 피터의 테마 또한 이전의 경쾌함에 행진곡풍의 웅장함을 한 방울 더해냈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결국 중심에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을 직면하며 극복하는 피터의 여정이 있다. 음악이 여러 장면을 오가면서도 계속하여 피터의 테마로 돌아오는 이유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GS아트센터
2부에서는 짧은 곡 소개와 함께 바로 라벨의 어미 거위가 연주됐다. 어미 거위는 하나의 스토리가 아니라, 페로, 도노와, 르프랭스 드 보몽 등의 동화에서 영감을 받은 짧은 이야기들이 연달아 펼쳐지는 구성으로 작곡됐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관람했다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인물들과 장면들의 나열에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피소드를 하나 하나 살펴보면,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엄지 동자>, <미녀와 야수> 등 익숙한 내용이 펼쳐진다.
<피터와 늑대>와 달리 곡 중간에 나레이션이 없기 때문에 관객은 라이브 드로잉과 오케스트라 연주만을 통해 이야기를 유추해야 했는데, 덕분에 긴 호흡으로 아티스트의 드로잉에 집중할 수 있었다. 또한, 음악의 흐름에 맞춰 장면을 그려내면서도 세부 묘사를 놓치지 않는 작가의 역량이 더욱 돋보였다. 개인적으로는 동물들의 털을 섬세하게 표현해 사실감을 살린 그림체가 뇌리에 깊게 박혔다. 또한, 등장인물이 악보 사이를 뛰어다니는 등 익숙한 장면을 새롭게 연출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공연을 보며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시각과 청각이 결합될 때 감상 경험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가였다. 자연스럽게 영화 음악 콘서트와도 비교하게 됐다. 영화 음악 콘서트가 이미 존재하는 영상을 오케스트라와 맞춰서 상영하는 방식이라면, 시네스테틱스는 음악이 어떤 이미지와 연출로 시각화될지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또 다른 긴장감과 기대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시각적 요소가 더해졌을 때 음악은 후순위가 될까.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관객이 시각적 요소에 몰입하기 위해서는 음악이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더욱 탄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는 시각적 요소와 조화를 이루며 상상력을 확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앙코르로 연주된 리로이 앤더슨의 Plink, Plank, Plunk! 역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역량을 보여준 무대였다.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을 뜯는 피치카토 주법만으로 연주되는데, 한정된 주법 안에서도 곡의 강조점과 다이내믹을 경쾌하게 풀어낸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지휘자 백승현과 단원들이 만들어낸 유쾌한 에너지는 공연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이번 공연은 어린이와 성인이 함께 즐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가족 단위로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예상보다 어린 관객들의 집중도가 높았다. 각 악기의 개성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으면서도 이야기가 풍부한 음악과, 음악의 흐름에 맞춰 변화하는 드로잉은 아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인상적인 장면이 펼쳐질 때마다 감탄을 내비치면서도 다른 관객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관람 태도는 배울 점이 많았다.
반면 성인 관객들에게는 어릴 적 접했던 음악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만나는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 이야기와 그림을 따라가며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익숙한 음악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피터와 늑대>라는 친숙한 작품으로 공연의 문을 열고, <어미 거위>를 통해 보다 깊은 감상으로 나아가게 한 프로그램 구성 또한 모든 관객층에 효과적으로 다가갔다고 생각한다.
클래식 음악과 라이브 드로잉이 만나 만들어낸 새로운 감상 방식은 어린이와 성인 모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다가갔다. 무대를 향한 뜨거운 시선과 환호는 시네스테틱스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음악 감상의 새로운 가능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