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결혼 준비의 풍경들: 사회 구조의 축소판
나는 아직 결혼을 앞두지도, 그렇다고 누군가와 썸을 타는 단계에 있지도 않다. 하지만 장차 있을지도 모를 나의 결혼식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계속 고민한다. 함께 사는 것이 혼자 사는 것보다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제목부터 묘한 긴장감을 주는 책 제목이 나타났다. 바로 이소연 저자의 <수상할 만큼 완벽한 결혼식>이다. 저자는 한국 특유의 규격화된 결혼 문화를 ‘정상성의 컨베이어 벨트'에 비유한다. 책을 읽다 보니 명절마다 친척들의 따가운 결혼 잔소리가 떠오른다.
도대체 결혼식이 뭐가 그렇게 수상한 걸까? 식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은 로비 전광판에 빼곡히 적힌 그날의 ‘결혼식 리스트’다. 마치 기차역의 배차 시간표처럼 수많은 이름이 30분 혹은 1시간 단위로 정렬되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식이 시작되면 모든 부부가 꿈꿔왔던 ‘저마다의 인생에서 한 번뿐인 특별한 하루’가 펼쳐지지만, 그 모습은 아이러니하게도 천편일률적인 공정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결혼은 결혼식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결혼식을 하기 위한 준비 절차마저 하나의 거대한 의례가 되어버렸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모든 결혼의 시작은 웨딩 박람회 방문으로부터 소환된다. 예비부부는 정보의 비대칭 구조 속에서, 자신이 결제하는 항목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른 채, 웨딩이라는 의례를 위해 연봉을 상회하는 엄청난 값을 기꺼이 지불한다.
여기에 ‘다른 사람이 선택하니까 나도 따라 선택하게 되는’ 밴드웨건 효과가 강력하게 작용한다. 소셜미디어는 물론 선순환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각자의 가장 최고의 모습이 전시된 웨딩 사진과 영상을 보며 우리는 완벽하게 통제된 것들을 마치 당연히 해야 할 기본값으로 여기게 되는 기현상을 겪게 된다.
한국인들은 좋게 말해 너무 성실한 탓일까. 우리는 삶의 모든 과정을 성실하게 밟아간다. 그러나 그 과정의 결과물들을 바라봤을 때, 정작 우리는 가장 개인적인 순간조차 가장 규격화된 방식으로 경험하기에 이르렀다. 저자의 말마따나 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혼이라는 의식 하나로부터 한국 사회의 구조가 가진 단면을 축소해서 볼 수 있게 된다. “부모의 재력에서 비롯된 자원의 불평등, 남녀에게 부여된 역할, ‘개성’이라 불리는 문화 자본”이 한데 뒤섞인 광경을 우리는 결혼식 속에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결혼식의 주인공은 정녕 신부인가?
2장에 들어서면 저자의 문장이 더욱 매워진다. 흔히 ‘결혼식의 꽃은 신부’라고들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 화려한 수사 뒤에 숨겨진 산업의 논리를 파헤치며, “가부장제, 외모지상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의 교차로에 바로 결혼이 있다.”라고 적나라하게 지적한다.
결혼식의 지난한 준비 과정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다. 그런데 여성들은 이 과정을 놀랍고도 지나치리만큼 완벽하게 수행해낸다. 물론 일생에 한 번뿐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식에서 꼼꼼하고 세심한 준비가 꼭 나쁜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말할 순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 여성들은 ‘기꺼이’ 그것을 한다. 여성이기에 할 수 있는 마지막 투자이자 사치 심지어는 선물로 그녀들은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의 시선으로 본 결혼은 가부장제 사회가 만들어놓은 ‘출산’과 ‘육아’의 출입문에 불과하다. 결혼 후 아이를 가지고, 출산 후에도 이전 몸매를 유지했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자랑 그리고 내 아이가 뒤처지지 않게 키우겠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레이스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결혼뿐만 아니라 생애 주기 전반을 담당하는 일종의 프로젝트 매니저로서, 철저한 시간 분배와 노동을 통해 가족의 화합을 위해 기능하는 존재로서 자리한다.
결혼으로 시작된 이 거대한 담론의 끝에는 결국 ‘여성들이 모든 것에 대해 행하는 완벽주의’와 그것의 근본적 원인으로서의 ‘가부장제 사회’가 있다. 사회학 낸시 초도로우와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의 말을 저자는 가져와, 가족 제도와 사회적 양육 과정을 통해 여성에게는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순종적이고, 세심하며, 자기 관리에 철저한 이상적 여성상을 반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여성이라는 젠더로 완성되게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웨딩 드레스와 여성 자신이 바라보는 몸의 관계는 어떠한가. 최근 친구의 소개로 방문한 에스테틱 샵에서의 경험은 이러한 분석을 더욱 실감 나게끔 했다. 처음에는 내 건강과 미래를 위해 투자해보라는 상술이 그럴듯하게 들렸으나, 점차 내 신체의 모든 고르지 못한 부분을 친절하게 지적하며 추가 관리에 대한 결제로 끝없이 유도하는 광경을 접할 수 있었다. 결혼 적령기 여성이기에, 결혼식 직전에 급하게 받는 것보다 받아두는 것이 나중을 위한 ‘현명한’ 선택이 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책에서 다뤄지는 신체 부위 중에 ‘승모근’에 대한 담론이 눈에 띄었다. 솟은 승모근이야말로 여성의 신체에서 소위 ‘여성답지 못하다’고 여기는 부위 중 하나기 때문이다. 비단 승모근뿐이겠는가, 팔뚝, 부유방, 피부, 머리 한가닥 조차 모든 것은 판단과 검열의 대상이 된다. 결혼식의 주체라 칭송받으면서, 정작 신부는 결혼식에서 모든 시선 속에 종속당한 ‘사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적나라한 분석을 늘어놓는 나조차 이 견고한 한국식 결혼 문화에서 자유롭다고 단언할 순 없다. 비판하는 사람이 빠지기 쉬운 가장 큰 오만은 자신이 비판하는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는 초연하다는 착각이다. 나 역시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구별짓기’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취향, 조금 더 특별한 예식을 꿈꾸며 굴레 밖으로 나가려 애쓰겠지만, 결국 내가 도달할 곳 역시 비슷한 사회적 조건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는 ‘집단적 동일성’의 안식처일지 모르지 않은가. 시스템을 의심하면서도 그 시스템이 주는 안전벨트를 완전히 풀지 못하는 이 모순이 바로 내가 느끼는 ‘수상함’의 본질이다.
3. 나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상함을 계속 기록하는 이유는, 적어도 내가 어느 컨베이어 벨트 위에 서 있는지는 알고 싶기 때문이다. 화려한 장식 뒤에 숨겨진 시스템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배차 시간표가 아닌 우리만의 속도로 걸어갈 준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