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한한 인간이 살아남는 법 [문화 전반]

죽음의 사회학적 이해
글 입력 2020.08.07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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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죽음이 무서웠다. 정확히는 언젠가 내가 이 지구에서 영원히, 끝도 없이 영원히 사라진다는 변하지 않는 사실을 떠올리면 가슴이 탁 막히는 두려움과 요상한 기분이 마음속을 겁 없이 휘저었다. 내가 누리고 느끼고 있는 것들이 물에 푹 잠긴 귀와 눈이 기능하는 것처럼 뿌옇게 워터마크 처리 되었다.

 

물론 나는 젊고 창창한,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도 있는 나이이다. 막 건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심지어 장례식장도 가본 적이 없고 주위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감정의 결들을 느끼며 살아가지만, 유독 이 감정만큼은 말을 꺼내기가 부끄럽다. 아니, 부끄러움을 넘어서 어디 숨고 싶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머뭇거려진다. 나 자신이 쓸데없이 웃자란 애어른, 혹은 사춘기도 벗어나지 못한 유약한 어린아이같이 보일 것 같아 겁이 나기 때문이다.

 

인간 개인의 죽음이 아닌 죽음 그 자체에 대한 담론이나 이야기를 사회 주류에서 나누는 일을 보기 힘든 현황도 부끄러움에 한몫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모여 취향, 가치관, 심지어 인생 이야기까지도 나누곤 하지만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과 글, 이론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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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사회심리학에 속하는 ‘공포관리이론’이 있다.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음을 말하고 그 사실이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기제와 행동 양상을 밝혀낸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일어날 죽음을 상상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수면 위로 끌어내는 모습이 신선했고, 특히 이런 점이 사회적 행동으로도 나타난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유한성에 영향을 받는 존재가 나뿐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이 되었다.


공포관리이론의 ‘죽음 현저성’은 인간이 죽음과 관련된 이미지에 노출되었을 때 훨씬 극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보여준다. 죽음 현저성에 노출되면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적인 불안감이 발생하고 이러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싶어진다. 소비자의 경우에는 속한 문화권에서 가치 있게 인정받는 상품을 획득함으로써 소속감을 얻고 불안감을 완화한다.

 

그 밖에도 인간관계, 여행, 가치판단 등 다양한 분야에서 죽음 현저성의 효과가 드러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의식을 잘 피해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그 어떤 것보다 죽음 이슈는 우리와 딱 달라붙어 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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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이 공포관리이론에 대한 것을 집대성한 책 [슬픈 불멸주의자]를 재미있게 읽었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죽어 버리는 짐승이야. 그런데도 돈이 있으면 뭔가를 사고, 사고, 또 산단 말이지. 나는 인간이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들이는 까닭이 마음 한 구석에 자기가 산 물건 중 영원한 삶이 있으리라는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가끔 나의 회의적 생각의 레이더가 돌아갈 때면 이런 고민에 빠지곤 한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좋은 대학교에 가고 뭔지는 알 수 없지만 행복할 것임이 틀림없는 삶을 사는 것을 욕망했다. 하지만 대학생활이 끝나고 나면 이제 나는 죽을 때까지 갖고 싶은 것을 욕망하고, 그걸 위해 돈을 벌고, 또 새로운 것을 원하고, 돈을 벌고 이런 것의 반복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저 문구가 특히 찔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을 끝까지 안고 가다간 돌이킬 수 없는 허무함에 빠질지 모른다. 책 [슬픈 불멸주의자]가 특히 마음에 들었던 이유는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심리를 납득 가능하게 하나하나 펼쳐 설명한 뒤 역시나 납득 가능한 건전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포 관리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저자들은 죽음과 함께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실행 가능한 접근법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생자필멸이라는 현실을 더 잘 알고 수용하기. 둘째, 죽음을 초월한다는 감각을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강화하기가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러운 비유이긴 하지만, 감기 초기 증세로 가래가 올라올 때 뱉지 못하고 삼키면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 결국 콧물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며 코감기에 걸리곤 한다.

 

이처럼 생자필멸의 진리를 무시하고 피해가 보아도 언젠가는 무너진 댐의 둑처럼 더 독하게 새어 나와 마음을 휘감을지도 모른다. 죽음에 대한 건강한 담론이 사회에 더 많아졌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속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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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사회학자 버나트 크레타즈는 죽음 카페라는 모임을 조직하여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고, 이제 ‘데스 카페’는 더 많이, 멀리 뻗어 나가 생겨났다고 한다.

 

사실 이런 예시를 동경하는 나조차 자살률 1위이자 죽음의 질 순위에서 하위권을 차지하는 우리나라에서 ‘죽음 카페’라는 모임이 있다고 한다면, 왠지 모를 두려움이 생겨서, 당당히 드러내지 못할 것 같아서,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등의 이유로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 같다. 무언가 공포 웹툰의 소재같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건 나의 문제일까? 

 

 

"박쥐, 지렁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육체적 죽음과 직면할 때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 그러나 인간이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 인간은 죽을 운명임이 아주 살짝만 암시돼도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세상에 남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는 사실이다.“

 

 

동전의 앞뒷면이 가장 가까이 붙어 있는 것처럼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인식은 정반대로 생의 욕구,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로 거의 동시적으로 발현될 수도 있다.


죽음을 잊기 위해 인간이 길고 긴 역사 동안 꾸려온 종교, 철학, 문화, 사회 등등...을 잘 이용한다면 말이다.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 또한 일종의 '흔적 남기기'를 하는 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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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탐구하는 것도, 신이라면, 불멸하는 존재라면, 필요 없어요. 왜?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이 짧은 시간 우리가 바쁘게 탐구하지 않으면 답을 찾는 지점까지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최대한 서둘러야 합니다. 죽을 날이 마지노선으로 있으니까. 탐구 자체도 인간적인 특성을 갖습니다. 죽지 않으면 탐구는 필요 없어요. 굳이 애써 노력할 필요가 없어요. 천천히 배워도 늦지 않고, 아등바등 살 필요도 없어요.“

 


책 [생각의 싸움]에서 이 문장을 보면 왠지 모를 활력이 생겨난다. 우선 무언가라도 붙잡고 탐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언젠가 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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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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