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눈사람] 싱클레어, 모든 것은 너에게 달렸어 - 데미안

글 입력 2020.04.02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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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데미안 포스터_510x740_outline.jpg

 
 
지금까지 살아온 날 중 며칠이나 자신의 삶을 살았을까? 주체적으로, 내가 원해서, 나를 위해서 살아온 순간은 얼마나 될까?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막상 생각해보면 대답하기 어렵다. 그 전에, ‘나를 위한 삶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 그 질문은 잊고 있던 감각들을 깨운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만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내용의 소설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것들을 생각한다. 선과 밝음만을 인정하던 반쪽뿐인 세상을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딘다.

 
 
그려왔던 그 모습 그대로, 뮤지컬 <데미안>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머릿속에서만 그려내던 것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의 감상은 모두 다르겠지만, 뮤지컬 <데미안>은 그 모든 감상을 하나로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 배경과 조명, 음악까지 모든 것들이 ‘데미안’을 그리고 있었다.
 
 

뮤지컬 데미안_공연 사진_정인지 김바다.jpg

 
 
조금은 어두운 배경, 기울어진 듯한 신비한 무대, 뒤엉킨 의자들은 아름답기만 하지 않은 우리의 세계를 보여줬다.

원작의 추상적인 표현을, 무대 장치들은 물리적으로 표현해냈다. ‘싱클레어’가 의자를 바르게 놓으며 밝음을 노래하면, ‘데미안’은 그 의자를 뒤집으며 세상의 이면을 노래했다. 뮤지컬은 줄거리만을 나열하지 않고, 그 속의 숨은 의미들을 차곡차곡 담아냈다.

뮤지컬 <데미안>의 조명은 무대 위를 하나의 세계로 엮었다. 시공간, 이미지, 선악과 감정을 빛으로 표현했고, 관객의 시선을 무대 밖으로 옮길 수 없게 만들었다. “폐허 속의 별”의 이미지를 그대로 무대 위에 담았다.

‘싱클레어’의 세계 그 안의 갈등, 설렘, 만남, 그리고 ‘데미안’을 조명으로 그려내었다. 원작에 대한 이미지를 배경과 소품이 형상화했다면, 조명은 그 이상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뮤지컬 데미안_공연 사진_김주연 유승현.jpg

 
 
뮤지컬 <데미안>은 두 명의 배우가 등장했다. <데미안>은 성별, 역할에 구분이 없는 캐스팅 방식을 가졌다. 이 방식은 <데미안>이 가진 추상성과 신비로운 분위기에 꼭 맞았다.

“어른도 아이도 소년도 소녀도 아닌 데미안”은 특정한 이미지를 갖기보다는 그 내면의 표현이 맞는 배우가 진행했으면 했다. 뮤지컬 <데미안>의 캐스팅은 완벽했다. 이미지에 국한되지 않고, 내면이 ‘데미안’ 표현에 충실했던 덕에 더욱 원작의 이미지에 가깝게 재연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싱클레어를 위하여


내가 내 인생을 살고 있는데, 분명 나는 나인데, 진짜 “내 인생”을 사는 건 어렵다. 세상의 기준에, 타인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꾸미고, 스스로 무얼 원하는지 자꾸만 잊게 된다.

처음부터 몰랐듯, 끝까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 당연하다. 태어났고, 살아있으니까 살아갈 뿐인 삶. 아름다운 것만을 찬양하고, 찬양받지 못할 모든 것들을 억압하며 사는 삶. ‘싱클레어’는 그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죽어가던 인물이었다.

선악의 구별보다 중요한 것은 선과 악이 인정이다. ‘데미안’은 왜 사람들은 밝고 선한 신만을 찬양하냐는 질문을 던진다. 선이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인 것은 맞지만, 선만 존재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악이 있기 때문에 선이 존재한다. ‘데미안’은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하는 ‘압락삭스’라는 신을 소개한다. 아무리 외면하고 비난해도,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선한 사람,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어떻게 완벽하게 선할 수 있겠는가? 내면의 욕망, 분노, 우울을 인정하지 않고 꼭꼭 숨겨 둔다면, 속에서 곪을 수밖에 없다. 외면한다고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일은 자기 자신으로 가는 첫 번째 길이다.
 
 

뮤지컬 데미안_공연 사진_김현진 전성민.jpg



해소되지 못한 분노와 억압은 원치 않는 결과를 낳는다. ‘싱클레어’가 ‘크로머’를 찾아갔던 그 날처럼, 인생을 뒤바꿀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세상의 기준에 지쳐가던 ‘싱클레어’가 스스로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크로머’를 찾아가는 선택을 한 것처럼, 인지하지 못한 감정은 비뚤어진 결과를 만든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내면의 외침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오로지 고통과 결과만을 탓한다.

그에게 나타난 ‘데미안’은 말한다. “그건 전부 네 선택이었어.” 원작을 읽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 말은 냉정하면서도 무척 뜨거웠다. 사실은 모든 일이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척하면서, 사실은 선택의 결과의 결과이다. 단지 내 선택이라는 사실이 인정하기 어려운 거고, 그 선택을 하기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실수를 범했을 뿐이다.

‘싱클레어’가 그간 외면해온 것들과 외면받아온 것들은 뒤엉켜 그를 ‘크로머’에게로 향하게 했다. 선택의 결과라는 ‘데미안’의 말은 ‘싱클레어’를 탓하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다시 한번 그에게 선택하라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보이라는 말이었다. 강한 의지는 결국 닿을 거라 하며, ‘싱클레어’에게 의지의 중요성을 알렸다.

‘싱클레어’를 떠나는 ‘데미안’은 그에게 다시금 말한다. 둘의 재회는 ‘싱클레어’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싱클레어’는 그 후 계속해 알을 깨고 자신의 삶을 향해 나아간다. 방황하고 깨지며, 불안정한 몸부림을 하던 ‘싱클레어’는 강한 의지를 통해 다시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를 만난다. 어린 시절보다 한층 성숙해지고, ‘데미안’을 닮은 모습으로 말이다.
 
 

뮤지컬 데미안_공연 사진_김바다 정인지.jpg



자기 자신을 향해 걷는 그 길이 바로 삶이라 생각한다. 평생을 가도 완전한 자아를 찾아내기 어려울 수 있지만, 포기하는 순간 또다시 껍데기뿐인 삶을 살게 된다.

“바른” 길이 아닌, “나의” 길을 가라고, ‘데미안’은 말한다. 바른길이란, 허울뿐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정의한 바른길을 걷더라도, 그것은 온전한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선과 악을 인정하고, 구분해낸 후, 진정한 이해로 도달한 선만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사는 일이 어렵고, 두려운 사람들이 분명 많이 있을 테다. 그들이 꼭 ‘데미안’을 만나길 바란다. 뮤지컬 <데미안>은 원작을 본 사람에게 더 와닿을 수 있는 작품이지만, 원작 자체도 은유적이기 때문에, 줄거리게 국한되지 않고 흐름에 따라 솔직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 모든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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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를 알고, 나의 어떠한 모습들을 인정하고, 삶을 “선택”이라 부르는 건, 사실 상당히 무섭고 어려운 일이다. 더는 타인의 그림자 뒤에, 세상의 기준 뒤에 숨어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뢰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로 펼쳐질 자기만의 삶을 신뢰하고, 그 길을 걷기 위해 용감하게 알에서 깨어나야 한다. 눈 앞에 펼쳐질 자신의 삶을 위해 한 걸음 내디뎌, 그 아름다운 모습을 마주하길 바란다.

뮤지컬 <데미안>은 흐릿한 원작의 이미지를 잡고, 자신을 위한 한걸음의 가이드가 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무대 위는 단순한 또 다른 공간이 아닌, 관객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만의 ‘싱클레어’, 그리고 ‘데미안’을 만나보자. 원작이 사람마다, 읽는 시기마다 다르게 읽혔듯, 뮤지컬 <데미안> 역시 모두에게 다르게, 그러나 각자 바라던 바로 그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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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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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  
  • 김정은
    • 데미안같은 사람이 곁에 있던 싱클레어는 참 행복해보이네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과 관심을 받았으니까요
      필진님 말씀대로 악을 인정하지 않으면 선을 만나기 어려워요
      더 이상 곪지않도록 본인을 마주 보고 싶네요
      연극도 보고 싶구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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