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수많은 물음표의 방향타가 되어줄 연극 "후회하는 자들"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의 규정 그 사이에서
글 입력 2019.12.19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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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하는 자들>은 성전환 수술로 타고난 성별을 바꾼 두 사람의 이야기이다. 60대가 된 이들은 서로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후회’, ‘성 정체성’, ‘성적 재규정’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다. 여성의 삶과 남성의 삶을 동시에 경험한 이들은 성전환 수술 후의 삶이 자신이 이전에 꿈꿔왔던 삶과 거리가 멀었다고 회상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다르지만, 성을 규정하지 않고 ‘무엇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부정당하지 않는 삶 그 자체를 갈망한다. 작품은 두 번의 성전환에 대한 시선을 넘어, 삶을 살아가는 내내 끈질기게 작동하는 성(정체성), 문화적 억압, 개인의 행복, 후회와 선택의 문제에 관해 여러 관점으로 접근한다. 성별 구분의 억압과 한계, 정상과 비정상을 가로질러,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에 반문한다.


 


정체성에 관해



나의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을 경험할수록 ‘나’라는 사람을 정의하기 어렵다. 움켜쥐려 할수록 손에서 빠져나가고 말로써 고정된 이미지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꼭 액체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변한다. 나를 둘러싼 환경과 사람이 변하고, 내가 보는 것들이 변하고, 나의 작은 생각들이 변하고, 그렇게 연쇄적인 변화가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나는 나의 어느 한 구석조차도 멈춘 상태를 포착할 수는 없다. 심지어 내가 사랑한다고 확신하는 것조차 그 순간에만 유효할 뿐이다. 사랑한다고 깨닫기 전에는 그 존재조차 몰랐을 수 있고, 사랑한다고 깨달은 후에도 얼마든지 싫어질 수 있다. 혹은 그것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가 나타날지도. 아무튼 아주 작은 것조차 영원히 확신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나’와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정의하려 발버둥 치면서 평생을 살아간다. 한 인간의 삶의 목적이 자신이라 보았을 때,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그 목적을 알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스스로를 채 알아가기도 전에, 우리는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증명을 요구받는다. 작게는 내가 왜 이 집단의 구성원이 되어야하는지에 관해서, 크게는 이 사회에 기여할 나의 쓸모에 관해서. 그런데 이때의 증명은 순수한 나의 존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사회로 내보이는 증명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함이 아니라 사회에 속하기 위함일 때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설명이 왜 필요하며, 그것을 왜 내보여야 하는가?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깊이 있는 고뇌, 그뿐이면 되는데.


그러니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나의 정체성은 보이지 않는 틀에 의해 조정된다. 때때로 그 모습이 나의 한 면과 비슷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어떠한 요소를 빼고 더하면서 결국 꺼내놓은 내 모습은 ‘나와 비슷한 어떤 것’ 혹은 ‘내가 아닌 어떤 것’이 되어버린다. 사회에 속한 이상 계속해서 나를 드러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그를 위한 나의 고정적인 모습에 대한 선택과 증명의 압박은 계속된다. 그러다보면 나조차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를 만들어가게 된다.



 

답을 얻으려 했던 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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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_이은경)

 

 

길고 긴 서론은 이쯤하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한다. 연극 <후회하는 자들>은 복잡하지 않다. 무대에서 배우들은 70여분 동안 성전환수술을 후회하는 두 인물 올란도와 미카엘의 인터뷰를 재연한다. 이 단순한 플롯 안에는 우리 사회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혹은 영원히 답을 내릴 수 없을 수많은 물음표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정체성의 규정’으로 귀결된다.


연극을 보기 전, 나는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라는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지고 극장에 들어갔다. 미리 다른 후기를 보지 않았던 건 이 연극을 통해 답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트랜스젠더와 젠더 이분법, 정체성의 규정, 선택과 책임의 무게 등 스스로 쉽게 풀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그래서 연극의 초반에는 그들의 말 한 마디, 생각 하나에 촉각을 세웠다. 당사자로서의 시각에는 내가 깨닫지 못했던 시각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기다리는 답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고, 대신 이 모든 것들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을 얻었다.




수많은 물음표에 대한 표지판, <후회하는 자들>



주인공 올란도와 미카엘은 성전환 수술을 받은 후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다시 남성의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객관적인 사실만 봤을 때 둘의 경험은 매우 흡사해 보이지만, 그 이면의 이유는 상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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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_이은경)

 

 

먼저 올란도는 현실적인 이유로 성전환수술을 원했다. 불우한 환경에서 어렵게 자란 그는 동성 매춘을 했다. 그러다 덴마크 최초의 성전환 수술을 받은 크리스틴 요한슨의 이야기를 알게 되고, 그 삶을 동경하게 된다. 돈이 많은 남편과 결혼한 뒤 행복하게 사는 그 삶을 위해 올란도는 수술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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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_이은경)

 

 

반면 미카엘은 자존감의 문제로 수술을 원한다. 어릴 때부터 외모와 성격모두 사회적 남성성과 거리가 멀었던 그는 늘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여장남자 모임에 나갔고, 그곳에서 이전에는 받지 못했던 인정을 받게 된다. 이에 그는 미카엘라로서의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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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_이은경)

 

 

먼저, 이들이 수술을 결심한 과정은 나의 허를 찔렀다. 사실 그들의 사정을 듣기 전, 나는 그들이 분명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깊은 고민을 통해 수술을 결심했을 것이라 넘겨짚었다. 이들을 한 데 묶어 한 집단으로써 일반화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들은 좀 더 개인적이고 현실적인 이유로 수술을 택했다. 우리는 ‘트랜스젠더’라 칭해지는 집단이 결국 작은 개인들을 묶어 말하는 것이라는 걸, 다시 말해 거대한 명칭 뒤에는 서로 다른 개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토록 깨부수고자 하는 고정관념과 증명의 이슈는 이러한 안일함이 모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들을 그러한 ‘선택’으로 내몰았던 것은 사회의 잘못된 역할 규정 때문이었다. 두 인물이 공통적으로 원했던 것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이었다. 이때의 새로운 삶이란 타인으로부터의 인정과 사랑을 받는 것으로 잘못된 여성상과 직결된다. 연극을 보는 중간 이따금씩 불편함이 느껴졌던 건 진짜 여자처럼 보이기 위해 두꺼운 화장을 하고 긴 머리의 가발을 쓰고 치렁치렁한 옷만을 입었다는 그들의 말과 모습 때문이었다.


나는 여성의 당사자로서 그것이 여성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우리를 억압하고 있다는 것을 매번 경험한다. 그래서 아주 오래전부터 지속된 ‘예쁘게 치장하고 그것으로 인정받는 수동적 존재로써의 여성’은 타파해야할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꾸밈으로써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라니, 사랑과 행복에 목말라했던 올란도와 미카엘에게는 달콤한 선택지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잘못된 역할 규정과 그에 의한 올란도와 미카엘의 선택은 그들이 그들로써 인정받을 수 없다는 본질적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고, 둘은 선택에 후회하게 된다.


한편으로, 그들이 왜 그러한 방식으로 여성을 규정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 남성과 여성,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그들은 여성으로써의 삶을 선택한 이상 누구보다도 ‘여성’ 집단에 파고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사회가 규정해둔 여성의 모습을 위해 더욱 더 과장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결국 여성혐오적인 시각이나 조롱의 의도가 아니라, 본래의 목적이었던 ‘인정’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던 것이다.


덧붙여 결론에서 귀결되겠지만, 이들의 이러한 모습 또한 누군가 ‘여성의 모습’이라고 규정해두지 않았다면 일종의 취향이나 개성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애초에 우리 사회가 그것을 고정관념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그 모습 그대로가 순수하게 그들이 ‘원하는 것’으로써 존중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들을 다시 회귀의 늪과 후회로 내몬 것은 ‘증명의 압박’이었다. 수술 이후의 삶을 살면서 올란도와 미카엘은 점차 후회하기 시작한다. 사회가 규정하는 남성과 여성, 그 어디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그들은 또 한 번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들을 한 평생 괴롭게 만들었던 ‘정상’의 범주가 또 한 번 그들을 후회로 물들인다. 수술 뒤에도 하루에 몇 번씩 수염을 밀고 과도한 치장을 하며 살았지만, 그들은 ‘진짜 여성’이 될 수 없었다. 소속되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사회의 구미에 맞는 증명은 할 수 없었고, 결국 그들은 제외된다.


애초에 수많은 인간들 중 같은 인간이 단 한 명도 없는데, ‘여성’과 ‘남성’이라는 무식하게 단순한 범주로 나눈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맞지 않는 옷 두 개를 들고 고민한 것과도 같다. 그리고 이들에게 맞지 않는 옷 두 개를 들려준 것은 바로 사회이다. 맞지 않는 옷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삶 끝에서야 이 모든 것이 허무한 것임을 깨닫는다. 여전히 성기 복원 수술을 간절히 원하는 미카엘에게 올란도는 ‘그게 무슨 소용이냐’ 묻는다. 그의 말이 맞다. 애초에 너무 다양한 우리가 멋대로 만들어진 틀 안에 스스로를 집어넣는 것은 소용없는 짓이다. 까짓 거 떼어버릴 수도 다시 붙일 수도 있는 성기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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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산수유 제공(사진_이은경)

 

  

이 모든 비극은 다양성보다는 편리함을 추구했던 우리의 지난 시간들이 불러왔다. 억지 틀을 만들어 개개인을 쉽게 분류해버리는 무책임함이 지속된 결과는 작은 개인에게 커다란 염증으로 돌아온다. 염증을 느끼는 자에게 사회는 가혹하다. 다시 한 번 틀을 공고하게 만들기 위해 그들의 염증쯤은 방치해버리니까. 그러나 ‘사회’라는 존재는 결국 개인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거대한 사회 뒤에서 우리가 방치로 일관한다면 그 결과는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할 것이다.


결국 정체성에 대한 답도 다양성에 대한 답도 완벽히 얻지 못했다. 그러나 가져야할 물음표를 가졌다는 것과 일상 속에서 무뎌졌던 것들에 다시금 민감해질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반성’을 거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스스로가 가진 의문에 대해 다른 것으로부터 완벽한 답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의문으로부터 답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일종의 표지판은 늘 필요하다. <후회하는 자들>은 우리에게 필요한 그 표지판이 되어줄 연극이다.

 




[김윤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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