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적인 폭력] 11. 내 인생 서열주의의 시작, 탑 클래스

글 입력 2019.12.17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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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내 인생 서열주의의 시작, 탑 클래스



내게 중학교 시절은 그리움의 시절이다. 친구들과 노는 게 삶의 전부였던,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던 그 시절은 이젠 신기루처럼 느껴진다. 내가 다시 그때처럼 순수할 수 있을까, 그때처럼 낙관적일 수 있을까. 현실의 녹록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지금엔 모두 무의미한 질문들이다.

 

그런데 그런 중학교 시절과 정반대로 고등학교 시절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로 기억된다. 내게 학교에 갇혀 지냈던 3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였다. 그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까지 차단한 건 바로 ‘탑 클래스’였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모의고사 성적 상위 15등만 따로 공부하는 자습실인 ‘탑 클래스’가 있었다. 그 밖의 아이들이 모여 공부하는 자습실을 ‘큰 클래스’라고 불렀는데, 모두 줄여서 ‘탑클’, ‘큰클’이라고 지칭했다. 모의고사를 볼 때마다 ‘탑클’에 누가 들어가게 될지가 모든 학생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새롭게 들어간 아이는 기뻐했고, 자리를 지킨 아이는 안도했고, 큰클로 떨어진 아이는 절망했다. 그중에서 나는 한 번도 탑클에 진입하지 못한 아이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그 차이는 내게 더 극명하게 다가왔다. 내가 다녔던 중학교는 시골에 위치한 아주 작은 중학교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사교육은커녕 학교 수업도 제대로 듣지 않은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정석처럼 전해오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다는 말이 그때 나에게는 통하는 말이었다.

 

그렇게 순탄한 중학교 생활을 마치고 겁도 없이 지원한 특목고는 전쟁터였다. 처음 성적표를 받고 경이로운 등수에 깜짝 놀랐다. 차가운 바닥과 난생처음으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수업만 듣고도 괜찮은 성적을 챙겨가던 때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가 버렸다. 수업은 기본이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치열하게 공부하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득했다.

 

문제는 수업도 따라가기 벅차다는 것이었다. 수학 시간엔 다른 아이들은 앞에 나가 칠판에 자신 있게 문제 풀이를 작성하는데 나는 문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영어 시간에는 원어민 선생님의 자비 없는 영어만이 교실을 가득 메웠다. 입학과 동시에 생긴 자괴감은 모의고사 날, 탑클래스는 턱도 없는 성적표를 마주할 때마다 더욱 심해졌다.

 

그래도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2학년이 되자 절망적인 성적표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느꼈던 박탈감과 탑클에서 떨어진 아이의 울음소리만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모의고사 이후 자습실 자리를 옮기던 날이었다. 당연히 내 자리는 큰클이었다. 기대도 없었기에 실망도 없었다. 벽에 붙은 자리표를 확인하고 짐을 옮기려 힘없이 몸을 돌리는데 다른 반 아이가 눈물 젖은 얼굴로 자신의 자리를 보고 있었다. 직전까지 탑 클래스에 있던 아이였다. 당황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아이를 뒤로하고 짐을 옮겼다. 옮기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 아이가 걱정돼서가 아니었다. 내가 벗어나지 못한 큰 클래스가 누군가에게 그런 경멸의 대상이라는 게 비참해서였다.

 

짐을 모두 옮기고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복도를 걷는데 방금 전 울던 그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그 아이를 달래주는 친구가 있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들렸다. 그중 어떤 한마디는 아직도 내 뇌리에서 잊히지 않는다.

 

“나도 처음 탑클에서 떨어졌을 땐 너무 화나고 서러워서 일부러 그쪽 복도도 안 지나가고 빙 돌아갔어.”

 

그때 우린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모두 똑같은 자습실이었다. 그저 탑클의 수용인원이 적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모든 학생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담임 선생님마저도 탑클에 들어갈 수 있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반 아이와 내기를 펼치기도 하였다. 그 내기는 반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때의 상황이 조금 기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모든 사람이 탑클을 좋은 것으로 생각했을까, 왜 아무도 그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왜 우리는 자습실의 차이만으로 우월감과 박탈감을 느껴야 했을까. 왜 선생님들은 우리가 그러한 감정을 갖도록 유도했을까.

 

성적을 기준으로 특별반을 만드는 것은 우리 학교만의 일이 아니었다. 다른 학교는 수업까지도 분리해서 들었다고 했다. 학생 개인마다 실력 편차가 있기 때문에 수준별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자습실처럼 불필요한 분리까지 두어야 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만약 고등학교 때 탑 클래스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게 없었다면 나의 열등감도 조금은 덜해졌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탑 클래스는 수많은 수단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는 마음속으로 성적에 따라 친구들을 줄 세웠다. 어떤 아이를 만나든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 둘 중 하나로 분류할 수 있었다.

 

하위권의 나에겐 대부분 나보다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그런 와중에도 애써 나보다 성적이 낮은 친구를 찾아 위안 삼았고, 그러다 그 친구가 갑자기 높은 점수를 받으면 나 혼자 뒤처졌다는 생각에 남몰래 속상해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3년 내내 다른 아이들보다 공부를 못한다는 열등감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내게 사람의 가치는 성적표의 숫자로 대변되었다. 숫자의 크기는 곧 내 존재 가치의 크기였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결정될까? 이보다 어리석은 질문이 또 있을까. 그런 걸 결정지을 객관적인 잣대 같은 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다르며, 그 어떤 것도 인간의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너무나 편의적으로 우리들의 우열을 가렸다. 더 나은 인간상을 양성하는 학교에서 내가 배운 건 남보다 못한 나에 대한 자책뿐이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고등학교 동창들은 모두 저마다의 길을 걷고 있다. 똑같은 것을 배우고 똑같은 목표를 공유하던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내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게 멋지다며 앞날을 응원해주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시절, 탑클에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크게 부러워했던 친구였다.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서 그런 부러움은 무의미해진 지 오래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탑클이었던 친구들이 부럽지 않다.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고작 모의고사 성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탑클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대한 나의 열등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성적 이외의 많은 잣대가 사람들의 우열을 가른다.학점, 경제력, 스펙 등을 기준으로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뒤처져 있다. 한 번 내재된 서열주의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남과 비교하며 얻는 우월감과 열등감이 나를 괴롭힌다. 그 대상이 탑클이 아닐 뿐, 여전히 나는 수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남들의 뛰어남을 나의 열등함과 연결 짓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내 마음은 아직 큰 클래스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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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금미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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