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잊히지 않는 것들,불후의 명작

글 입력 2018.01.26 0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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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잊히지 않는 것들
불후의 명작


 세상에는 유독 잊히질 않는 그림들이 있는 것 같다. 정정한다. 세상이 아니라 '개인'에게 유독 잊히질 않는 그림이 있다.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간혹 마음에 무척 드는 그림을 발견하면 캔버스에 머리를 박는 상상을 한다. 그 감동은 혼란을 닮아있다. 굳이 이미지화시키자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 모두 삼켜져 믹서기로 돌려지는 것 같다.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지금까지 내가 품어왔던 사고와 감정을 한데 뒤섞인 기분이 든다. 그것은 모든 작품이나 물체에서 파생될 수 있지만, '명작'은 좀 더 쉽게 그런 기분에 젖어 들게 만든다. 명작이 명작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는 것은 그 작품 안에 작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을 볼 때마다 붓이 아니라 물감을 손으로 쓸어내린 것 같다. 필자가 생각할 때, 명작은 다분히 육체적이다. 풍부한 표현력은 그 작가를 상상하게 만든다. <불후의 명작전>은 그것을 다시 확인할 기회가 되었다. 김기창의 작품은 그림은 차라리 구도에 가까웠고, 천경자의 작품은 마음 속에 들이부어진 뜨거운 수프같았다. 이중섭의 작품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 외에도 많은 작품이 마음을 흔들었지만, 필자는 해당 전시회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두 작품을 꺼내오려 한다.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종이에 채색, 130x162cm.jpg
천경자,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1976, 종이에 채색, 130x162cm


1.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천경자의 작품은 전시실 끝에서 그 몽환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천경자의 작품은 아득한 정신 속 가장 아름답고 슬픈 곳을 그대로 옮겨온 것만 같다. 코끼리 위에서 얼굴을 파묻고 있는 여자는 '영원한 나르시스트'인 천경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얼굴을 가리고 맨몸으로 무릎을 감싸 안은 여자는 노란 빛으로 빛나는 초원은 삶과 기억을 해쳐온 것처럼 보인다. 그림의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 그림에 죽음이 눈물방울처럼 번져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에서는 다양한 생물이 가득 차 있지만, 정작 그림의 정중앙에 있는 여자에게 '얼굴'은 없다. 그것은 커다란 슬픔이다.

 49라는 숫자는 불교의  사십구재를 떠오르게 했다. 불경에서 설한 바에 의하면 사람의 존재 상태를 4가지로 구분하는데, 그것은 ① 생유(生有) ② 사유(死有) ③ 본유(本有: 生에서 死까지 생애) ④ 중유(中有: 이생에 죽어서 다음 生까지를 말함)이다. 이들 중 네 번째의 중유(中有)의 상태의 정상적인 기간이 49일이다.  사람이 죽은 뒤에는 일반적인 경우 49일이면 중유(中有)가 끝나고 다음 생(生)이 결정된다. 다음 생이 결정되기 전인 48일째에 정성을 다하여 영혼의 명복을 비는 것이 49일재라고 하는데, 필자는 그림을 보면서 코끼리를 탄 그녀의 페이지가 어떤 '끝'에 닿지 않았을까를 상상했다. 그녀가 탄 코끼리의 발 아래에 꽃이 잔뜩 뿌려져 있는 것도 그렇고, 코끼리의 무덤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그녀의 그림은 실제로 봤을 때 더 강한 인상을 준다. 죽음과 슬픔이라는 소재가 뒤에 배치된 나무처럼 무겁게 녹아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삶을 사랑하는 나르시스트였기에, 그림에 아름다움이 남아있는 것이다. 한동안 그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르시스트'인 그녀를 위해서라기보다, 나를 닮아서였을지도 모른다.


이중섭, 황소, 1953,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35.5x52cm.jpg
이중섭, 황소, 1953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35.5x52cm


2. 이중섭, 황소

 이중섭을 모르는 한국인이 얼마나 있을까. 안타까운 생애와 불꽃 같은 그림은 잊으려해도 도저히 잊히질 않는 개성을 가지고 있다. 모니터로 보면 커다래 보이는 <황소>는 실제로 봤을 때 매우 자그만 크기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 작은 존재에 압도된다. 강한 터치에는 주저함이 없다. 강렬해 보이는 붓질이 소의 근육 하나하나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선 하나하나의 표현이 꿈틀거리는 근육이 되고, 뼈가 된다. 야성과 힘에 빈틈은 없고,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은 순수하기보다 짐승답다. 잔뜩 발기한 생식기는 황소의 강인함과 야생을 생생히 드러내고 있다. 천경자의 그림이 몽환적이고 다소 서양화가 다운 느낌이 있었다면, 이중섭의 그림은 현실의 가장 투박한 부분을 한국의 한의 정서에 맞춰 거칠게 표현한다. 천경자가 비단이라면, 이중섭은 사포다. 천경자의 그림에서 눈물이 느껴지는데, 이중섭의 그림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

 <황소>를 나중에 그려진 <피 흘리는 황소>와 비교해보는 것도 즐겁다. <황소>에는 굳건한 의지와 힘이 느껴지는 데 반해, <피 흘리는 황소>는 처절한 절망과 비명이 녹아들어 있다. 40년의 인생을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다간 작가를 떠올려 보면, 황소는 작가에게 참 특별한 존재였던 것 같다. 농원에서 밭을 가는 황소는 가정적이면서도 강하다. 우리 문화권에서 황소는 뚜렷한 삶의 의지를 가진 표상이다. 시대적 비극에서 예술과 가족을 그리며 몸부림 치던 작가는 황소를 닮았다. 그 에너지는 그대로 남아 감상자의 마음에 불을 붙인다.

*

 여기에 모든 작품을 소개할 수는 없었지만 단언컨대, 최근에 필자가 방문한 전시회 중 가장 심장을 쥐어뜯고 긁는 작품들이 많았던 전시였다. 모든 작품이 '명작'이 될 수 있지만, <불후의 명작>에 걸린 작품들에는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할만한 격정이 녹아들어 있다. 그림을 잘 볼 줄 몰라도, 여러 작품을 거닐다 보면 금방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명작'이고, 그 날카로운 감정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도 '불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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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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