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예술교육 강의를 듣고 있는데, 문화예술과 사회 부분을 배우며 '배리어프리'라는 단어와 교육 자료로 본 청각장애인 댄서를 인터뷰하는 영상이 기억에 남았다.
'배리어프리'는 장애인 및 고령자와 같은 사회적약자들의 사회생활에 지장이 되는 물리적인 요소와 심리적인 장벽을 없애자는 의미다. 이런 배리어프리의 요소는 사회 전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쪽에서도 보이는데 공연 진행 시 화면에 띄워지는 자막이 대표적인 예다.
강의를 듣고 나서 보러 간 연극 <다시 쓰는 세계>도 자막이 나오는 연극이었다.
연극 <다시 쓰는 세계>는 2026년 장애문화예술원 문화 향유 부문 선정작으로 2025년 모두예술극장에서 올린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의 후속작이기도 하다. 주인공 유림은 수어와 구어를 함께 쓰는 농인 여성으로 엄마를 잃고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혼자 살아간다.
극은 엄마를 잃은 슬픔, 농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적인 시선을 받는 삶 속에서 슬픔을 잊고 '자신만의 세계'를 찾아나가는 유림의 여정을 보여준다. 그 여정은 Y와 소년, 타인, 동료, 이웃이라는 네 개의 파트로 나뉜다.
'Y와 소년'은 유림의 '내면 속 인물'로 각각 유림의 엄마와 아빠를 나타내는 형상이다. 극을 보면서 이 형상들이 유림의 내면 속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빠에 대한 어색함이 담겨있다고 느꼈다. 소년은 유림과 마찬가지로 농인인데 청인 Y와 농인 소년은 내면의 모습이지만 실제 사회 속 청인과 농인을 대변하는 듯 보였다.
'타인' 파트는 농인, 장애인이 사회 속에서 겪는 불편함과 청인, 비장애인의 차별적인 시선을 보여준다.
출근길, 유림이 탄 지하철이 갑자기 멈춰 선다.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없었던 유림은 같은 칸에 있던 두 승객에게 무슨 일인지 묻는다. 유림이 잘 듣지 못한다는 걸 알게 된 승객은 목소리를 높여 크게 말하지만 유림에게는 오히려 그 말이 더 알아듣기 어렵다. 유림은 그냥 천천히, 평소처럼 말해 주면 된다고 차분히 알려 준다. 그러자 이번에는 승객들이 말도 할 줄 아는 유림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도움이 되고자 한 행동은 유림을 불편하게 만든다.
선의로 건넨 도움이 상대에게는 불편함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신기해하는 눈빛'이 또 하나의 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유독 마음에 걸린 건 나 역시 그 승객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관람 안내가 수어와 자막으로 함께 진행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극 속 승객들의 시선을 마주하고 나서야, 악의 없이 보낸 그 호기심 역시 누군가를 '다른 사람'으로 구분 짓는 시선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유림은 극단에서 일을 한다. 직접 연기하지는 않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작은 피드백을 건네며 '동료'와 함께 한다. 여기서 또 다른 갈등이 나오는데, 주연배우와 조연배우 사이의 갈등이다.
주연배우들은 불쑥 나타나 연기를 봐 달라고 하고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유림의 피드백은 제대로 듣지도 않고 가 버린다. 조연배우는 그런 주연배우들을 받쳐 주는 역할이지만 '그 역할을 존중하고 작은 역할을 맡아 줘서 고맙다며 동정하는 듯한 그들의 시선'을 못마땅해한다.
이 장면을 보며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보내는 동정 역시 당사자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웃'은 같은 건물에 사는 명석과의 이야기다. 유림은 자신의 감정을 글로 풀어내는데, 명석이 우연히 유림의 글이 적힌 종이를 주워 읽고 위로받는다. 두 사람은 모두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냈다는 공통점이 있고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준다.
누구나 겪는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견디며 성장한 유림은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간다.
연극 <다시 쓰는 세계>는 농인이든 청인이든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청각장애인 댄서의 인터뷰 영상을 보면서도 '농인 아티스트'라고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는데, 이 연극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별의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그 슬픔을 견디며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
유림이 자신의 세계를 다시 써 내려갔듯, 우리 사회도 장애를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써 내려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