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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미술관에 걸린 화면보호기 [문화 전반]

레픽 아나돌의 AI 작품을 둘러싼 아름다움과 예술성의 논쟁

by 주아현 에디터
2026.11.08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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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픽 아나돌의 AI 작품을 둘러싼 아름다움과 예술성의 논쟁


       

      2022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 로비에 거대한 화면보호기가 등장했다. 수많은 작품 이미지를 학습한 인공지능이 쉴 새 없이 색채와 형태를 만들어낸다. 스크린에서는 형형색색의 입자가 밀려왔다 흩어지기를 반복하고, 관객들은 그 앞에서 감탄하며 휴대폰을 꺼낸다.

       

      그런데 이 화려한 광경을 탐탁지 않게 바라본 사람이 있다. 미국의 미술평론가 제리 살츠는 레픽 아나돌의 《Unsupervised》를 두고 ‘50만 달러짜리 화면보호기’라고 비꼬았다. 세계적인 미술관에 전시된 최첨단 미디어아트가 그에게는 값비싼 컴퓨터 배경화면에 불과했던 셈이다.

       

      나는 이 비유가 꽤 흥미로웠다. 작품을 직접 보지 않은 사람도 화면보호기가 어떤 것인지 안다. 아름답게 움직이지만 별다른 의미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미지. 살츠는 아나돌의 작업을 바로 그 지점에서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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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사가 아름다운 데이터가 될 때


       

      《Unsupervised》는 MoMA가 소장한 방대한 작품 데이터를 학습해 만들어졌다. 지난 200년간 축적된 미술관의 소장품들이 알고리즘을 거쳐 끝없이 변화하는 추상 이미지로 나타난다.

       

      얼핏 보면 미술의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반 고흐의 붓질과 뒤샹의 변기는 같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더라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한쪽에는 회화의 표현에 대한 고민이, 다른 한쪽에는 예술의 정의 자체를 뒤흔든 질문이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학습 데이터가 되는 순간에는 어떨까.

       

      알고리즘은 그 차이를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하는 대신 이미지의 패턴과 특징으로 처리한다. 작품이 만들어진 이유나 당시의 논쟁보다는 색채와 형태가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는 재료가 된다.

       

      물론 다른 작품을 가져와 재구성하는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뒤샹부터 앤디 워홀, 셰리 레빈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끊임없이 기존 이미지를 차용해 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이미지를 다시 보여주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을 가져왔고, 왜 가져왔는지가 작품의 의미를 만들었다.

       

      아나돌의 작품에서는 이 과정이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서로 다른 시대의 작품들이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매끄럽게 섞이고, 그 차이는 화려한 색채에 가려진다. 수백 년의 미술사를 담았다고 하지만 정작 그 역사에 담긴 갈등과 질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이 작업을 보며 느끼는 아쉬움은 여기에 있다. 미술사의 방대한 데이터를 사용했지만, 그 미술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미술관은 왜 이 화면을 선택했을까


       

      더 흥미로운 것은 작품이 놓인 장소다.

       

      MoMA는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소장해 온 미술관이다. 이곳에 작품이 전시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관객은 어느 정도 예술적 가치를 기대하게 된다.

       

      그런 공간의 로비에서 거대한 AI 이미지가 끊임없이 움직인다. 작품을 잘 몰라도 쉽게 감탄할 수 있다. 화면은 화려하고, 규모는 압도적이며, 사진으로 남기기에도 좋다. 오늘날 관객들이 미술관에서 기대하는 경험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여기서 미술관과 기술 기업의 이해관계가 겹쳐 보인다. 미술관은 새로운 기술을 통해 더 많은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있고, 기술은 미술관이라는 권위 있는 장소에서 예술의 이름을 얻는다. 서로에게 매력적인 만남인 셈이다.

       

      물론 관객이 작품을 좋아하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잘못은 아니다. 미술이 반드시 어렵고 불편해야 할 이유도 없다. 다만 관객을 사로잡는 능력과 작품이 가진 예술적 깊이를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인스타그램에서 수없이 공유되는 이미지가 반드시 좋은 사진은 아니듯, 미술관에서 가장 많은 시선을 끄는 작품이 반드시 가장 많은 생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아나돌의 작품이 보여주는 기술은 분명 놀랍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읽다 보면 얼마나 많은 데이터를 학습했는지, 얼마나 복잡한 알고리즘을 사용했는지가 자주 강조된다. 어느 순간 작품을 감상하는 것인지, 기술의 성능을 감상하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한다.

       

       

       

      화면이 꺼지고 난 뒤


       

      그렇다고 살츠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인 색채의 움직임이나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 자체도 예술이 될 수 있다. 작품이 반드시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회화를 공부하면서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를 자주 경험한다. 잘 그려진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고, 무엇을 그렸는지 단번에 알아볼 수 없는 그림이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한다.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색채나 화면의 긴장감이 작품을 계속 바라보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아나돌의 작업 역시 단순히 화려하다는 이유만으로 낮게 평가할 수는 없다. 미술관의 아카이브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경험하게 한다는 점은 분명 흥미롭다. 인간의 손으로는 만들기 어려운 이미지의 흐름도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그 가능성이 곧 예술적 성취를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나돌의 작업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AI가 예술을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그동안 작품의 어떤 부분을 예술적 가치로 판단해 왔는지, 그리고 새로운 기술 앞에서도 그 기준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더 가깝다.

       

      7미터의 스크린이 꺼질 때 남는 것은 무엇일까.

       

      화려한 색채가 움직이던 장면일까. 아니면 그 화면을 통해 새롭게 생각하게 된 무언가일까.

       

      적어도 미술관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인간이 만들기 어려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는 이유만으로 작품에 찬사를 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기술이 정교해질수록 그 이미지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지 더욱 꼼꼼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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