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벽면에 테이프로 툭 붙여진 바나나 한 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코미디언>이 미술계에 던진 충격은 거대했다. 조셉 코수스를 위시한 개념미술가들이 "물질을 버리고 개념을 택할 때 예술의 본질에 도달한다"고 찬양했던 그 오랜 믿음의 연장선 위에서, 카텔란은 썩어 없어질 하찮은 과일에 수억 원의 가격표를 달아두었다. 이 작품의 진짜 의도는 명확하다. 과연 무엇이 예술의 가치를 결정하는가? '미술관'이라는 제도와 '인증서(개념)'가 결합하는 순간 일개 유기체가 어떻게 자본의 거대한 거품으로 둔갑하는지 냉소적으로 폭로하는 풍자였다.
그러나 이 철학적 도발은 대중에게 도달하는 과정에서 완전히 왜곡된다. 언론과 대중이 이 작품을 소비하는 방식은 오직 "단순한 바나나 한 개가 수억 원에 팔렸다"는 자극적인 가격표와 가십성 뉴스뿐이다. 개념미술이 일상의 시각적 감각을 배제하고 난해한 '그들만의 리그'로 갇혀버렸기에, 대중은 이를 심도 있게 사유하는 대신 일회성 흥미 거리로만 소비할 수밖에 없다. 특권층의 기호 독점 구조 속에서 대중은 철저히 소외된 관람자에 머무는 것이다.
이 구조적 모순은 급기야 관람자들이 전시된 바나나를 직접 떼어 먹어버리는 해프닝으로 폭발했다. 2019년 아트바젤 마이애미에서 한 행위예술가가 "배고프다"며 바나나를 먹어치웠고, 국내 리움미술관에서도 한 관람객이 "아침을 안 먹어 배고프다"며 이를 뜯어 먹은 뒤 껍질을 다시 벽에 붙여놓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대서특필된 이 사건들은 현대 미학이 마주한 딜레마를 가장 원초적으로 보여준다.
이들이 뉴스 1면을 장식하며 폭발적인 화제성을 끌어낸 것은 역설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 대중은 난해한 미술관의 권위와 거액의 화폐 가치가 매겨진 허울 좋은 기호 시스템을, 가장 본능적인 행위(배고파서 먹기)로 통쾌하게 조롱하고 해체해 버렸다.
결국 바나나를 먹어 치운 일련의 사건들은 특권층이 독점한 개념미술과 자본의 권위에 대한 가장 허탈하면서도 통쾌한 대중적 저항이다. '탈물신화'를 부르짖던 개념미술이 결국 세련된 기호의 폭력으로 전락했을 때, 그 거룩한 성벽에 허기를 채우며 던진 대중의 한 입은 현대 예술이 잃어버린 감각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일깨워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