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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에는
영화 '레위기'의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가장 두려운 얼굴이 된다면.
이 가정문 자체부터 공포다.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고, 나와 네가 나눴던 추억과 기억을 모두 공유하는 환영 같은 공포. 분명 내가 가장 잘 아는 얼굴인데 더 이상 그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
이 영화를 알게 된 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때문이었다. 영화제에서 가장 관심을 많이 받은 영화 중 하나였고, 상영 직전까지도 취소표가 풀리지 않아 볼 수 없었던 비운의 영화. 그렇게 한동안 마음에 남아 있던 영화를 뒤늦게 만났다.
영화는 나임과 라이언, 두 청소년의 사랑 이야기인 것처럼 시작한다.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창고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세상의 눈을 피해 서로를 알아가길 선택한다. 이들에게 사랑은 숨겨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이기도 하다.
파국은 나임의 질투로 시작된다. 또 다른 남자아이 헌터가 라이언과 키스하는 것을 목격한 나임은 둘의 관계를 폭로하고 만다. 순간의 질투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미처 알지 못한 채.
라이언과 헌터는 '구원 치유'라는 의식을 받게 된다. 조잡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의식 아래 두 남자아이의 몸은 마치 구마 의식을 당하는 악마마냥 뒤틀린다. 설마 저런 방식으로 이들을 정말 괴롭히려고 하는 걸까. 진짜 죄라고 보여주는 걸까. 동성애를 '죄', '구원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 사회와 말이 통하지 않는 답답함에서 오는 공포를 처음으로 느꼈다.
그 이후부터 라이언은 나임을 피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날이 서고 두려움에 휩싸인 것 같은 연인의 모습에 나임은 직접 그 배경을 파헤치고자 한다. 한 번의 질투로 벌어진 일이라기엔 죗값이 너무 큰 것 같다는 생각을 뒤로하고. 관객 역시 변화의 원인이 그 '치유'에서 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다.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나를 구원하러 온 죽음의 치유자. 일종의 저주와 같은 이 '치유'는 인물이 혼자 남겨졌을 때만 발동한다. 모습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내가 가장 믿고 싶은 사람의 얼굴로 나타나 끝없이 죽음을 향해 몰아붙인다.
하지만 이들이 살아가는 마을은 신앙을 중심으로 형성된 폐쇄적인 기독교 공동체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일종의 공개처형을 당한 라이언을 보호하거나 지지해 줄 사람은 없다. 공동체가 죄라고 규정한 존재에게 공동체의 보호를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장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순간에 이들은 철저히 혼자가 된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서로. 그러나 매번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로 나를 죽이려 드는 위험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도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까.
영화는 이 지점에서 단순한 초자연적 공포를 넘어선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괴물은 공포영화에서 낯선 설정이 아니다. 그러나 '레위기'는 그 얼굴을 가장 믿고 싶은 사람에게 보여준다. 의심해야 살아남지만, 의심하는 순간 사랑하는 사람마저 잃어버릴 수 있다는 모순. 결국 살아남기 위해서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과 그 사람에 대한 기억까지 의심해야 한다.
관객도 매번 함정에 빠진다. 이번에는 그 눈빛이라면, 그 말투라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라이언이 아닐까. 나임과 함께 의심하고, 다시 믿고, 또다시 배신당한다. 차라리 완전히 낯선 얼굴이었다면 두렵기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했던 얼굴은 끝내 기대를 버리지 못하게 만든다.
믿고 싶은 마음이 무너뜨린 나의 일상에 대한 공포. 공포영화가 언제나 인기 있는 장르인 이유는 그게 누군가에겐 경험 가능한 공포이기 때문이겠지. 괴물이나 악령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내가 믿었던 사람이 낯설어지는 경험,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가장 위험한 관계로 뒤바뀌는 경험은 충분히 현실적이다.
성경의 레위기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지켜야 할 율법과 규범을 담고 있다. 그중에는 동성 간 성행위를 금지하는 구절도 있다. 영화가 제목으로 선택한 '레위기'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공동체는 자신들이 믿는 율법을 근거로 누군가의 사랑을 죄라고 규정하고, 그 죄를 씻어주겠다는 명목으로 끔찍한 의식을 강요한다.
여기서 가장 잔인한 것은 이들이 실제로 저지른 잘못과 공동체가 규정한 죄 사이의 간극이다. 나임의 질투와 폭로는 분명 라이언을 위험에 빠뜨렸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임에게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질투하고 상처 입힌 잘못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죄로 규정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영화 속 공동체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들에게 고통을 감내해야 할 의무를 부여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남는 것은 죽음의 치유자가 아니라 그 얼굴을 끝내 믿고 싶었던 마음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한 존재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실도 끔찍하지만,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고서도 그를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은 더 끔찍하다. 한 번 무너진 믿음은 괴물이 사라진다고 해서 온전히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