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 저자의 이력을 보고 미술을 둘러싼 돈과 권력에 관한 이야기를 기대했다.
미술이 시장과 후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말은 낯설지 않다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이고, 누가 제작비를 대고 작품을 소유하며 그 가격을 높이는지 궁금했다. 오랫동안 미술 현장에서 일해 온 저자라면 이런 과정의 복잡함을 논증하고 명확한 의견을 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책을 덮은 뒤에는 내용보다 읽는 속도가 기억에 남았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발견해 조금 더 따라가려 할 때마다 다음 사례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책의 첫 부분은 미술 생태계 전체를 조망한다. 리처드 윌슨의 작품과 아니쉬 카푸어의 〈클라우드 게이트〉를 거쳐, 감상의 대상이던 미술이 공간을 차지하고 관람객의 경험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옮겨 간다. 국가와 기업, 기술과 시장이 작품의 가치에 관여한다는 이야기도 이어진다. 저자는 이 현상을 한쪽으로 몰아 평가하기보다 여러 사례로 쪼개서 짧게 소개한다. 덕분에 미술의 가치가 작품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문제의식은 전달된다.
그러나 각각의 조건이 구체적으로 어떤 곳에서 발생하고 효력을 발휘하고 어떻게 사그라든지 알고 싶어질 무렵 이야기는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르네상스 미술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비슷한 아쉬움이 남았다. 조토, 우첼로, 얀 반 에이크, 보티첼리 등의 작품에 관한 양식과 도상 설명은 익숙한 미술사 교양서의 흐름을 따른다. 이 파트의 중심 내용은 미술과 권력이고, 작품의 제작을 권력자와 신흥 상인 계급의 주문에서 떼어 볼 수 없다는 관점은 흥미롭다.
하지만 그 관점을 살리려면 주문자가 무엇을 요구했는지, 화가가 그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이거나 바꾸었는지, 그 관계가 작품의 형태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좀 더 오래 서술해야한다는 생각이 있다. 하지만 작품 설명이 이어진 뒤 후원 관계가 덧붙는 구성에서는 미술의 제작 조건을 새로 이해했다는 느낌이 적었다.
개인적으로 좀 더 설명이 필요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역시 내가 가장 관심있는 부분이었다. 흑사병 시기의 그림 거래를 코로나 시기의 미술시장과 함께 살펴보는 대목은 흥미롭다. 오일머니의 유입과 작품 가격의 변화, 중국 컬렉터의 등장과 중국 작가들의 부상은 내가 처음 책을 들어 기대한 내용이었고, 저자도 깔끔하게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사례를 짧게 소개한 뒤 정물화의 의미나 다른 작가의 작업으로 화제가 옮겨 간다. 파트의 제목은 ‘예술적 가치와 시장의 가치는 일치하지 않는다’인데, 독자가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주로 작품의 평가와 가격이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 변화가 두 가치의 관계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살펴볼 여유는 많지 않다. 한 사례만 붙들어도 충분히 한 편의 글이 될 텐데, 책은 계속 새로운 사례를 보여 주는 쪽을 택한다.
이후 박물관을 다루는 파트에서, 영국박물관과 테이트 갤러리, 영국 현대미술의 부상을 다루는 부분도 그렇다. 박물관이 국가의 전략이 된다는 제목 아래 여러 사건과 공간이 등장하지만, 그 사이의 관계는 독자가 메워야 할 때가 많다. 이어지는 경매사의 업무와 온라인 경매, 소더비의 유명한 경매, 이름난 딜러와 컬렉터들의 이야기에서는 미술시장을 움직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작품의 값과 명성을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하는지 파고들기 전에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한 파트 안의 짧은 소제목들이 관심을 여러 번 환기하지만, 그만큼 생각이 한곳에 머물 시간은 줄어든다.
마지막 부분은 미술이 자산이 되는 방식으로 시선을 돌린다. 소셜미디어에서 취향을 드러내는 젊은 세대, 아트 마케팅과 협업, 사업가로서의 데이미언 허스트가 차례로 나온다.
책은 끝에서 순수한 미술은 없으며, 우리는 시대마다 아름다움과 가치에 새롭게 합의해 왔다고 말한다. 그 말에 이르기까지 내가 더 알고 싶었던 것은 그 합의의 구체적인 과정이었다. 작품을 만드는 사람과 값을 매기는 사람, 구매하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은 각각 어떤 힘을 가졌을까.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전망 역시 이런 차이를 살핀 뒤에야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하거나 새롭게 연결해 본 사례도 있었다. 미술사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짧은 글들을 따라가며 작품 밖의 세계에 관심을 넓힐 수도 있겠다. 나 역시 흑사병기의 거래나 새로운 컬렉터의 유입을 읽을 때는 페이지를 멈추고 싶었다. 바로 그래서 독자로서 아쉽다. 짧은 사례 중심의 구성은 입문 독자에게 접근하기 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래도 '순수한 미술 없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에 비해서 주장을 쌓아가는 말들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아는 작품 설명은 빠르게 지나갔고, 처음 만난 이야기조차 깊어지기 전에 끝났다. 책을 덮고 나니 여러 편의 짧은 영상을 연달아 본 듯하다. 소재는 많이 보았는데, 하나를 오래 들여다본 감각은 남지 않는다. 제목이 던진 질문을 생각하기 시작할 때마다 책은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