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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오디세이아'를 마주하는 두 가지 시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이아가 오랫동안 유효한 이유

by 문경란 에디터
2026.08.2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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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테 레히너는 인스부르크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공부한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로는 평생을 청소년 문학을 쓰는 데 바친 오스트리아의 작가다. 그녀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물론 《아이네이스》, 《니벨룽의 노래》, 《파르치팔의 모험》에 이르기까지 스무 편이 넘는 고대와 중세의 신화·영웅 서사를 오늘날의 독자들이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다시 풀어냈다. 그녀가 다시 쓴 《오디세이아》 역시 원전의 뼈대와 사건은 그대로 두되, 낯설고 방대한 서사시를 하나의 이야기로 편하게 따라갈 수 있도록 정돈한 판본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완결 서사시로서, 서사 문학의 원형을 체험하고자 하는 욕심에서 였다. 그런데 막상 책장을 덮고 나서 남은 것은 정리된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질문이었다. 왜 이 3천 년 된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붙잡는가. 그리고 동시에, 왜 이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곧 이 책을 읽는 과정이었다.

 

 


01. 고대의 유행가 : 이 이야기가 사랑받는 이유


 

《오디세이아》는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고전'의 이미지, 즉 소수의 지식인들이 서재에서 조용히 음미하는 텍스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문자가 지배하기 전, 이 서사시는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이야기였다. 음유시인들이 악기를 튕기며 그리스 전역의 연회장과 광장을 떠돌았고, 청중은 이미 알고 있는 대목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며 함께 탄식하고 환호했다. 즉 《오디세이아》는 정적인 서적이기 이전에, 고대 그리스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던 당대 최고의 히트 콘텐츠였던 셈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그토록 오랜 시간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답이 이야기가 다루는 두 개의 축, 즉 '신과 인간의 관계'와 '영웅 서사'를 당대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조건에 정확히 밀착시켰다는 데 있다고 본다.


먼저 신과 인간의 관계를 보자.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신은 저 멀리 떨어진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매일의 삶에 직접 관여하는 변수였다. 배가 난파되는 것도, 낯선 섬에서 뜻밖의 환대를 받는 것도, 오랜 방황 끝에 결국 길을 찾는 것도 모두 신의 뜻으로 설명됐다.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삶의 우연들__풍랑, 재난, 행운__앞에서 무력감을 느꼈고, 그 우연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세상을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었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이 매번 신들의 개입으로 요동치는 것은 바로 이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 결과다. 그러니 당대 청중은 오디세우스의 고난을 보며 '나도 언제든 신들의 변덕에 휘둘릴 수 있다'는 자기 삶의 조건을 함께 읽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세계관 위에 영웅 서사가 얹힌다. 사람들이 영웅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대체로 비슷하다.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대신 짊어지고 끝내 이겨내는 인물을 통해, 청중은 대리만족과 함께 '나도 저렇게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위안을 얻는다. 다만 그리스 서사시에는 이 영웅상이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아킬레우스처럼 압도적인 힘과 젊은 나이의 명예로운 죽음으로 영원한 명성을 얻는 유형이다. 그리고 오디세우스는 그 반대편에 있다. 그를 규정하는 것은 완력이 아니라, 상황을 읽어내고 우회하며 때로는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실용적인 지혜다. 거대한 외눈박이 괴물 폴리페모스 앞에서 그가 꺼내 든 무기 역시 힘이 아니라 "내 이름은 아무도 아님이다"라는 말장난이었다. 신과 운명이라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도 인간이 머리를 써서 그 틈새를 비집고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짧은 일화만큼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도 드물다.


바로 이 지점이 오디세우스형 영웅이 오래도록 사랑받아온 이유다. 완력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영웅은 우러러볼 수는 있어도 자신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반면 겁도 먹고 실수도 하면서 그때그때 머리를 굴려 위기를 넘기는 오디세우스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 '나도 저렇게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신들의 손아귀 안에서도 인간의 꾀만큼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 이야기의 태도가, 3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서사시를 낡지 않게 만드는 힘일 것이다.


 

 

02. 신과 영웅의 이야기: 우리는 왜 불쾌한가


 

하지만 이 매력적인 생존담을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을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어떤 불편함과 마주하게 된다. 그 불편함은 텍스트 자체의 결함이라기보다, 인간을 자유로운 의지를 가진 주체로 여기는 오늘날의 가치관과 고대의 세계관 사이에 놓인 근본적인 간극에서 비롯된다.


먼저 신들의 자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현대 과학이 부재하던 시대, 자연은 인간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거대한 풍랑이나 이유를 알 수 없는 흉년은 생존을 일순간에 무너뜨리는 절대적 공포였고, 인간은 그 무작위한 폭력 앞에 '이유'를 찾고자 했다. 바다가 거칠어지면 포세이돈이 분노한 것이었다. 이처럼 자연의 무자비한 힘에 인격과 의도를 부여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공포를 말을 걸고 달랠 수 있는 존재로 바꿔놓음으로써 안정을 찾으려는 인간의 지혜에 가까웠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 역시 맹목적 복종이라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삶 속에서 인간이 고안해 낸 나름의 생존 방식, 일종의 보이지 않는 계약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이 낡은 세계관과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 사이에 아주 큰 거리가 생겼다는 점이다. 계몽주의를 거치며 인류는 자연 현상의 원인을 신이 아니라 물리 법칙에서 찾는 법을 배웠다. 풍랑은 포세이돈의 분노가 아니라 기압과 해류의 문제이고, 병은 신의 벌이 아니라 세균과 바이러스의 문제라는 것을 체득한 것이다. 그 결과 삶을 좌우하는 주체 역시 신에서 인간 자신으로 옮겨왔다. 오늘날의 사회는 '나의 삶은 내가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전제 위에서 돌아간다.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이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노력을 통해 원하는 자아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감각__이른바 자아실현의 시대다. 학교에서는 진로를 스스로 설계하라고 가르치고, 직장에서는 각자의 역량과 성과로 평가받으며, 사회 전반에는 '노력하면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이런 사회에서, 인간의 운명이 신들의 변덕과 힘겨루기에 좌우되는 《오디세이아》의 세계는 낯설다 못해 부당하게 느껴진다. 오디세우스가 아무리 지혜롭고 용감해도, 결국 그의 생사를 쥐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아니라 포세이돈과 아테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에, 인간이 신들의 서사 안에서 소모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오늘의 감각과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해, 이야기 곳곳에 스며든 가부장적 질서와 폭력성 역시 쉽게 넘어가기 어렵다. 오랜 세월 정절을 지키며 구혼자들을 상대해야 했던 페넬로페의 자리, 그리고 귀환한 오디세우스가 구혼자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그들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하녀 열두 명을 목매달아 처형하는 결말의 잔혹성은, 영웅의 영광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__노예, 여성, 하층민__의 고통이 아무렇지 않게 소모되는 구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개인의 존엄과 권리를 삶의 기본값으로 여기는 오늘의 시선에서, 이런 장면들은 단순히 '옛날이야기'로 넘어가지지 않는다. 이 불편함을 서둘러 덮어두기보다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이야말로, 고전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는 첫걸음일 것이다.

 

 


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이아가 오랫동안 유효한 이유


 

그럼에도 이 이야기가 3천 년의 시간을 건너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그 불편함 아래에 시공간을 뛰어넘는 인간의 본질적인 조건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은 아마도 칼립소의 섬일 것이다. 그녀가 "나와 함께 늙지 않고 영원히 살지 않겠느냐"며 불사의 삶을 제안했을 때, 오디세우스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한다. 고통이 따를지라도 늙어가는 아내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늙어 죽을 권리를 선택한 것이다. 영원한 명성이 아닌 살아서 돌아가는 것을 향한 이 선택이야말로, 인간 삶의 유한함이 지닌 숭고함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완벽한 신도 성자도 아닌, 울고 겁먹고 때로는 잔인해지기도 하는 이 흠결 많은 인물이 그럼에도 끝내 머리를 굴려 목적지로 향하는 모습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이들에게 오래도록 위안이 되어 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디세이아》는 계속해서 다시 쓰이는 텍스트가 된다. 현대의 재해석들은 대체로 두 가지 시선 위에서 갈라진다. 하나는 비판적 시선으로, 원작이 침묵시킨 목소리들을 앞으로 끌어내 원작의 균열과 모순을 들춰내는 방식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가 대표적이다. 남편을 묵묵히 기다리며 정숙함의 상징으로만 소비되던 페넬로페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목매달려 죽은 열두 명의 하녀들을 등장시켜 영웅담 이면의 가부장적 폭력을 고발한다. 독자는 이 해체의 과정 속에서 고전의 권위가 무너지는 통쾌함과 해방감을 함께 느낀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 시선으로, 이야기가 품고 있는 보편적 공감의 힘을 오늘의 언어로 재현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감정적 통로를 여는 방식이다. 이 원형은 뜻밖의 자리에서도 반복된다. 낯선 땅을 떠돌다 결국은 돌아갈 곳을 그리워하는 현대의 여행기나 이주민의 회고록들 속에서도, 우리는 형태만 바뀐 '귀향'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고단한 하루하루 속에서 "나는 지금 왜 이 고생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10년 동안 풍랑을 견뎌낸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곧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유가 된다.


결국 《오디세이아》를 읽는다는 것은 어느 한쪽의 시선만을 택하는 일이 아니다. 이 이야기가 지닌 불편함을 정직하게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불편함 너머에서 여전히 뛰고 있는 인간의 오래된 맥박__생존하려는 의지, 목적을 향한 갈구, 돌아갈 곳을 향한 근원적인 그리움__을 함께 듣는 일. 그것이 이 낡고도 낡지 않은 이야기를, 아우구스테 레히너의 손을 거친 오늘의 판본으로 다시 펼쳐 드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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