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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영화 따라 걷기 ‘영월’ 편: 라디오스타, 왕과 사는 남자 [여행]

스크린 너머 사람 냄새를 따라, 영화의 도시 영월에 다녀오다

by 최수경 에디터
2026.08.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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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문화예술 분야들 중에서도 내가 가장 애정하는 영화. 즐겨본 영화의 실제 촬영지를 국내외로 찾아 떠나는 여정은 내게 그 어떤 경험보다도 깊고 특별한 몰입감을 선물한다.

 

최근 영월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거센 흥행 열풍을 타고 찾아온 관광객들로 활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곳은 사실 2006년 개봉해 가슴 깊이 묵직한 울림을 남긴 영화 <라디오스타>의 고향이기도 하다.

 

개봉 20년이 지나서야 <라디오스타>를 감상하며 울고 웃기를 반복하던 올해 초의 나는 이 따뜻한 감동 서사의 무대인 영월에 반드시 가겠노라 다짐했었다. 거기에 마침 일어난 '왕사남' 붐까지 더해져, 한층 더 설레는 마음으로 다녀온 뜨거운 8월의 영월 여행기를 적어본다.

 

 

 

세월을 견뎌낸 온기, <라디오스타>와 청록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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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시내로 들어서면 마치 20년 전 영화 <라디오스타>의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온 듯 착각을 일으키는 ‘청록다방’이 나지막이 반겨준다.

 

세월의 때가 정겹게 묻어난 소품들과 영화 속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이 공간은, 촬영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곧 이 자리를 지켜오신 사장님 덕분에 다방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영화처럼 다가온다.

 

특히 박중훈 배우와 이준익 감독의 빛바랜 싸인이 선명하게 새겨진 테이블 앞에 앉아있노라면, 낡은 소파의 감촉과 함께 현실의 시간표를 잊고 아득한 추억 속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온 듯한 아련함에 젖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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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잔을 건네며 환하게 웃으시던 사장님은 "코로나 시절 주변 상권이 하나둘 무너지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지만, 오직 영화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 하나로 전국 각지에서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준 분들 덕분에 이 자리를 버텨낼 수 있었다"라며, 다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을 향한 깊은 감사의 마음을 고백하셨다.

 

하지만 되려 감사한 쪽은 우리라고 말씀드렸다. 그 모든 어려움과 모호해지는 기억 속에서도 영화의 한 조각을 온전히 지켜내 주셨기에, 언제든 찾아와 추억을 덧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20년이라는 긴 시간 아득했을 버팀에 대한 존경과 고마운 마음을 전하자, 사장님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났다. 이렇게 영화를 매개로 사람과 사람의 온기를 이어주는 곳, 청록다방에서 그 시절 정겨움을 한 모금 마셔보자.

 

 

 

밤하늘이 건네는 위로,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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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혼자 빛나는 별은 없어.

다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거지."

 

 

영화 <라디오스타>에서 안성기 배우가 묵직한 명대사를 남긴 곳은 영월의 별마로천문대. 하지만 아쉽게도 치열한 예약 경쟁의 벽을 넘지 못한 나는 짙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은하수 투어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 밤이 선사한 풍경은 기대 이상의 경험이 되었다.

 

고요한 밤, 인적조차 없는 깊은 산속에 도달한 차량. 발 밑조차 분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조심히 내리라는 가이드의 안내에 순간 아득한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밤하늘의 눈부신 장관 앞에 그 거친 두려움은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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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비단 같은 영월의 하늘 위로 흐르듯 수놓아진 은하수는 그 이름처럼 참으로 맑고 투명한 은빛 자체였다. 망원경 렌즈 너머로 마주한 신비로운 토성의 띠, 그리고 사진으로 선명하게 담겨 나온 안드로메다은하의 웅장한 모습까지. 아득한 우주의 궤적과 별빛이 건네는 환상적인 풍경은 지금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이 세계에 대한 깊은 경이로움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렇게 머리 위로 쏟아질 듯 요동치는 별빛을 가만히 지그시 바라보며,  안성기 배우가 생전 그 특유의 나지막하고 따스한 음성으로 읊조리던 명대사를 마음속 깊이 다시금 되새겨보았다.

 

어쩌면 삶이란 거친 어둠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빛을 발하는 외로운 투쟁이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무심하게, 혹은 다정하게 보내주는 온전한 마음의 빛을 받아 비로소 서로를 온화하게 비춰주는 미약하지만 존엄한 반사체. 우리 역시 그렇게 서로의 빛에 기대어 세상을 다정하게 밝혀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영월의 차분한 밤공기와 오롯한 별빛이 가만히 일깨워주었다.

 

 

 

영월을 아우르는 애달픈 역사, <왕과 사는 남자>와 단종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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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여행의 또 다른 축은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의 거대한 흥행과 함께 수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단종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편은 험준한 암벽으로 막힌 천혜의 유배지 청령포. 오늘날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저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한데, 빽빽한 소나무 숲이 만드는 고립 속에서 외로이 매일을 견뎌야 했을 어린 단종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가슴을 짓눌러왔다. 이어 실제 영화 촬영지가 위치했던 선돌, 청령포에 홍수가 났을 때 단종이 피신해 머물었다던 관풍헌까지. 아름다운 풍경과 대비되는 역사적 슬픔에 마음에 묵직한 추의 무게가 얹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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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마음으로 이곳을 찾아 단종의 흔적을 밟고 그 애달픈 삶을 온전히 기억해 내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작고 다행스러운 안도가 찾아왔다. 스크린을 통한 이야기 덕분에, 이 수려한 풍경 뒤에 감춰져 있던 서글픈 역사가 비로소 잊히지 않는 생명력을 얻어 끊임없이 기억되고 있으니 말이다.


*

 

영화의 도시 영월이 머릿속에 오래도록 잔상을 남기는 이유는 단순히 눈길을 사로잡는 수려한 풍경이나 수식어처럼 붙은 영화 촬영지라는 타이틀 때문만은 아니다. 아득한 밤하늘을 채우는 별빛처럼 서로를 비춰주는 특유의 온기가 도시 구석구석에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영월의 영화 같은 매력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마주하고 싶다면, <라디오스타>의 미공개 자료와 영화 속 방송국 세트를 엿볼 수 있는 '라디오스타 박물관'이나 비운의 왕 단종이 편히 잠든 '장릉', 그리고 그 장릉을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온 호국사찰 '보덕사'를 둘러보는 여정도 추천하고 싶다. 스크린의 감동과 애달픈 역사의 궤적이 하나의 결로 이어지는 것을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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