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 집으로 돌아온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아내는 여전히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웅의 입장에서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아내에게 그 세월은 어떤 시간이었을까. 남편을 다시 만난 아내의 진짜 속마음은 어땠을까. 그리고 돌아온 영웅에 의해 죽게 된 열두 시녀들은 왜 죽어야만 했을까. 이들에게도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일 수 있을까. 마거릿 애트우드는 <오디세이아> 속 이타카의 왕비 페넬로페와 그녀의 열두 시녀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다시 쓴다.
죽어서 혼이 된 페넬로페는 세상에 떠도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 어떤 이는 자신을 정절을 지킨 여인이라며 칭송하고, 어떤 이는 108명의 구혼자와 잠자리를 가진 추잡한 여인이라 헐뜯었다. 그중 페넬로페의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이를 위해 정절을 지키지 않았던가? 온갖 강요에 가까운 유혹에도 아랑곳없이 그이를 마냥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야기의 공식 판본이 널리 알려지자 결국 내 꼴이 뭐가 되었나? 교훈적 전설. 여자들을 매질할 때 써먹는 회초리. 어째서 너희는 페넬로페처럼 사려 깊고 믿음직스럽고 참을성 많은 여자가 못 되느냐? 그게 정해진 대사였다. 가객도 그랬고 이야기꾼도 그랬다. 제발 나처럼 살지 마요! 나는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고 싶다.
- 페넬로피아드 16쪽
트로이 전쟁이 길어지자, 페넬로페는 왕궁의 재정을 직접 관리한다. 오디세우스의 재산을 불려 그가 떠날 때보다 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도 오디세우스는 돌아오지 않고, 그를 보았다는 이들의 소문마저 뚝 끊겨버리자 구혼자들이 몰려든다. 이들은 미망인이 될지도 모르는 페넬로페를 차지하기 위해 왕궁에 눌러앉아 식량을 축내기 시작한다.
오디세우스에게 충성하는 이들은 그를 따라 전쟁을 떠났기에, 남은 사람들 중 페넬로페의 편이라고는 시녀들과 유모, 어린 아들뿐이었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구혼자들을 염탐하기 위해 열두 시녀를 눈과 귀로 이용한다. 아들인 텔레마코스 또래의 젊은 시녀들. 이들은 어린 시절 텔레마코스와 함께 놀았던 놀이동무였고, 페넬로페가 직접 사들인 아이들이었다.
시녀들은 페넬로페의 지시에 따라 구혼자들을 사랑하는 척 행동하면서 정보를 캐낸다. 그러다 몇몇은 겁탈당하고, 몇몇은 구혼자에게 마음을 주어 죄의식을 느끼기도 한다. 페넬로페는 시녀들을 다독인다. “이것도 너희 주인님께 보답하는 방법이란다. 주인님이 돌아오시면 크게 기뻐하실 거야.”
하지만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108명의 구혼자를 모조리 죽이고, 텔레마코스에게 열두 시녀를 죽이라 명한다. 텔레마코스는 이들을 닻줄에 매단다.
오디세우스는 왜 열두 시녀를 죽였을까. 유모는 그들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기에 신뢰할 수 없어서 죽인 거라 말한다. 페넬로페는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신이 열두 시녀를 눈과 귀로 쓰고 있음을 숨겨 오해가 생긴 거라고 슬퍼한다. 하지만 남편의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기에, 시녀들을 변호하지 못한다.
오디세이의 해피엔딩은 페넬로페의 묵인으로 완성된다. 남편이 여신과 황홀한 정사를 나누느라 오지 않는 거라는 소문을 들었음에도 페넬로페는 돌아온 남편을 받아들인다. 그의 과거를 묻지 않고, 그의 교활하고 파렴치한 면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입을 다문다. 하지만 죽은 시녀들은 노래한다. 이들에게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그가 아이였을 때, 우리도 아이였고
그의 애완동물, 그의 장난감, 그의 누이,
조그마한 친구였더라.
그와 더불어 뛰놀 때는 미처 몰랐으나
그는 장차 우리를 죽일,
냉혹한 살인자로 자랄 운명이었더라.
미리 알았더라면 그날
물에 빠뜨려 죽여버렸을까?
- 페넬로피아드 86-87쪽
죽은 시녀들은 연극을 한다. 페넬로페와 오디세우스의 유모 역이 되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가 아닌, 다른 이야기 속 두 사람을 연기한다. 이 이야기에서 페넬로페는 구혼자인 암피노모스와 내연관계다. 두 사람은 오디세우스가 돌아온 걸 보고 당황한다.
“유모, 이제 큰일났어. 욕정에 몸을 맡겼다고 그이가 내 몸을 토막 낼 거야! 자기는 요정이나 미녀들을 보는 족족 눕혔으면서, 나만 여기서 얌전하게 본분을 다할 줄 알았나?”
“그 유명한 베틀로 수의를 짜는 척하며 사실은 이불 속에서 부지런히도 움직이셨죠! 그러니 이젠 할 말 없게 생기셨어요. 목이 달아나도요!”
“내 일을 아는 시녀가 누구누구지?”
- 페넬로피아드 167쪽
이 이야기 속 페넬로페는 자신의 부정을 덮기 위해 소문을 낸다. 시녀들이 구혼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고 배신했다고, 음란하고 사악한 이들이라 말해 죄를 덮어씌운다.
시녀들은 저승에서라도 오디세우스와 그의 아들을 재판에 세우고 싶어 한다. 분노의 여신이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길 바란다. 왜 우리가 비난받고 죽어야 했는가.
당신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신도 여왕도 암캐도 안 가리고
원 없이 욕정을 채웠으면서
당신에 비하면 우리 잘못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당신은 참 모질게도 심판하셨지
- 페넬로피아드 19쪽
영웅이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배신자와 적들을 학살한다면 정당한 심판인가. 그가 영웅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죽인 ‘업’이 돌아오지 않을까. 옛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했던 건지 오디세이아의 뒷이야기인 <텔레고네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그는 키르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텔레고노스의 창에 찔려 죽는다. 열두 시녀들이 저승에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며 만족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