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기우면 뭐가 될까. 당장의 상실이 힘들어서 했던 일들은 대체로 그 이후의 삶에 악영향으로 돌아왔기에, 상실은 상실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변하지 않은 생각이다.
흔히들 말하는 '후폭풍'이란 것은 결국 제대로 상실을 겪어내는 과정 중 하나일 것이다. 우리는 매번 상실을 겪을 때마다 달라지는 대처법에 당황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롯이 겪어내거나 평생 회피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는 없는 상황에서 매번 막막한 기분으로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런데 그 상실의 눈앞에 잃은 사람을 그대로 재현한 '무언가'가 생긴다면 나는 '그것'을 완전히 믿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아픈 마음에 위로가 될까.
나는 답을 정해놓고 각본을 읽었다. 결국 이들은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고, 완전히 상실을 겪어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치유해줄 수 있는 상실은 없다.
그 모든 걸 알고 있지만 과연 나는 내 상실의 모방품을 마주하게 되면 침착하게 넘어갈 자신이 없다. 내가 한 번 잃은 대상이 돌아왔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꼭 이렇게 이야기가 길어진다. 상실은 남은 사람들의 책임감, 미안함, 이기심, 분노, 후회 같은, 옅어지되 사라지지는 못할 감정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왜 '상자 속의 양'일까.
상자 속의 양은 『어린 왕자』에 나오는 상징이다. 계속해서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 왕자에게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상자 안에 있다"며 상상과 책임을 떠넘겨버린 조종사는 놀라고 만다. 어린 왕자가 만족해하며 이 양에게는 풀을 많이 줘야 하느냐고 물어왔기 때문이다.
상자에는 뭐든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이미 죽어버린 나의 아들 같은 것. 오토네와 켄스케는 사고로 잃은 아들 카케루와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를 입양한다. 이 휴머노이드는 상실을 대체하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상실을 더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존재다. 카케루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대했던 것들이 있고 멋대로 실망하게 된다. 멋대로 감동하기도 한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에는 정답이 없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한발짜국도 가지 못하게 한 채 휴머노이드이라는 상자 안에 가둬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아들과 완전히 똑같이 생긴 휴머노이드가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상처받고 깨닫고 나아간다.
-괴로움이나 슬픔 같은 건 없나요?
=마음이 없으니까요. 만약 그런 식으로 보였다면 그건 당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나의 감정...
=어차피 이 애는 당신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결국 그 안에 투영해서 본 것은 잃어버린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를 기억하는 나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상자 안에 무엇이 있느냐보다 중요한 건 언젠가 그 상자를 열 수 있느냐는 것 아닐까.
아직 영화를 보진 못했다. 살면서 나는 크고 작은 상실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마다 상자 안에 무언가를 넣어두고 잃지 않았다고 믿고 싶을지도 모른다. 다만 언젠가는 상자를 열어야 한다는 것, 그 안에서 걸어나오는 것이 내가 잃은 바로 그 존재일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지금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알고 있는 것과 견딜 수 있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