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 나이 80세, 팔복 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으러 서울에서 PD가 찾아왔다. 다 늙은 할매들이 글자 공부하는 모습에 누가 관심을 보이냐며 손사래를 치던 할머니들은, 한 번이라도 주인공이 되어보자는 선생님의 설득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본다. 가을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바로 '널려있는 시를 찾아오는 것'. 할머니들은 이미 거쳐온 삶 속에서 저마다의 시를 찾기 시작한다.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메인 포스터_제공 라이브(주).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6/20260621194207_glkulwun.jpg)
시, 끝내 터져나오는 마음을 담아
시의 본질은 '함축'이라고 배웠다. 고심해서 선택한 몇 안 되는 단어들, 대체로 완전하지 않은 문장들로 채워진 시는 마음을 설명하기보다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독자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정확한 단어를 고르는 명사수만이 쓸 수 있는 글. 아무리 부연설명을 덧붙여도 정확한 표현이 어렵다고 느끼는 나로서는 시인들을 오랫동안 존경해왔다.
그런데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속 할머니들이 시를 쓰는 방식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늘어지는 말을 추리고 추려 글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시는 겨우 터져나오는 것에 가까웠다. 잊히지 않는 첫사랑의 추억, 지금도 소녀의 마음으로 꾸고 있는 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트라우마와 극복, 이름에 얽힌 어머니와의 기억까지. 모두 말하지 않고 꾹꾹 참아왔지만, 드디어 틈을 찾아 고개를 빼꼼 내미는 이야기들이었다.
아, 이렇게 시를 쓸 수도 있는 거구나. 누군가에게는 시가 예쁘고 명료한 말로 열심히 깎아낸 것이 아니라, 참고 참다가 겨우 내쉬는 숨과 같을 수도 있는 거구나. 시가 절제의 결과물 대신 분출의 순간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 그리고 영화의 연출을 맡은 김재환 감독의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에서 다루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이다. 이 모든 걸 관통하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를 쓰기 좋은 나이
무언가를 하기에 딱 좋은 나이라는 건 누가 정한 걸까. 마치 퀘스트가 이어지는 게임처럼, 우리는 나잇대마다 수행해야 하는 역할들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건강하면 효도라는 어린 시절을 지나, 중고등학교에 입학하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좋은 아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대학에 들어가면 해방이라고 하지만, 마냥 놀면 조만간 시작될 레이스에서 뒤처지기 십상이므로 미리미리 계획을 세우고 취업을 준비해야 한다. 때가 되면 직장을 구해 독립해야 하며, 결혼을 하고 가정에 충실한 엄마이자 아내로 지내는 게 당연하던 시절도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게 정해진 틀에 반항감이 들다가도, 막상 각 연령대가 되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씩 그 규칙에 맞추어 달리기 시작할 때, 나도 열심히 달리는데 욕심만큼 결과가 따라오지 않을 때면 더더욱 부담만 커진다.
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된다. 이걸 지금 시작해서 뭐해. 남들 다 하는 거 대신 이걸 하면, 괜히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저걸 하면서 더 앞서나갈텐데. 이런 속삭임에 원하던 걸 미루고 또 미루다 보면 결국 '그때 그냥 해볼걸'이라는 후회에 닿는다.
무대 위 할머니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이런 아쉬움을 마주하는 태도다. 할머니들은 모두 어릴 적 학교를 다니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뒤늦게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은 이제서야 배울 수 있다는 게 억울하다는 한탄이 아니라, 드디어 글자를 읽고 쓸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 좋다는 즐거움을 노래한다. 교복을 입고 서서 까르르 웃는 모습에서, 아쉬움보다는 기쁨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무대 밖에서 이어지는 '가시나'
좋은 공연은 무대 위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공연을 보고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깨달음은 무엇일까? 나는 "지금 내가 무얼 해도 괜찮겠구나"라는 생각과, "그 어렵게 보였던 시를 나도 한 번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다른 사람들도 스스로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가장 시를 쓰기 좋은 나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실제로 극단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성인 문해교육기관 '푸른어머니학교'를 초청해 무대를 선보였고, 공연이 끝난 뒤 실제 문해학교 학생들의 시 낭독회를 진행했다. 지금 국립극장에서는 관객들의 시를 받아 보는 '팔복리 백일장'도 열리고 있다. 무대가 끝난 자리에서도 따뜻한 응원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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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한국뮤지컬어워즈 수상작으로도 유명하지만, 엄마와 함께 보면 좋을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기회에 나도 엄마와 함께 국립극장을 방문했다.

나란히 앉아 무대를 보는 내내, 나는 자꾸 엄마 쪽으로 눈이 갔다. 할머니들이 꾹꾹 눌러온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때마다, 엄마한테도 내가 모르는 시간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말하지 못한 꿈이 있었을 거고, 혼자 삼킨 날들도 있었을 거다. 여전히 고민 많은 딸을 응원하면서도, 당신이 힘든 이야기는 참는 엄마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공연을 보는 동안 함께 눈물을 흘린 우리는, 조금 더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자고 서로를 다독였다.
시작을 응원하는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오는 6월 28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볼 수 있다. 이후 8월까지 칠곡, 창원, 안동, 광주 ACC 등에서 공연이 이어질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