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숙제, 널려 있는 시를 찾아오기!”
여기도 시, 저기도 시. 선생님의 한마디에 학생들은 저마다의 시를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학생들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질 않나, 별안간 소주를 꺼내와서 삶을 한탄하질 않나. 거침없는 입담 뒤에 어린 소녀와 같은 마음을 지닌 이 학생들은 인생 팔십 줄에 한글을 깨치기 시작한 할머니들이었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도서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원작으로 한 우리나라 창작 뮤지컬이다. 경상북도 칠곡에 있는 팔복리 문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우고 자기만의 시를 찾아 나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을 그린 작품이다. 서울에서 내려온 다큐멘터리 PD인 석구는 이 모습들을 카메라에 담으며 지켜본다.
실제 문해 학교에서 할머니들이 쓴 시가 극의 넘버로 재구성되어 더욱 의미가 깊다. 공연장에서 판매하는 프로그램북을 통해 어떤 시가 어떤 가사로 재구성되었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극을 다 보고 나서 이 시들을 읽으니 할머니들이 살아낸 세월이 스쳐 어쩐지 뭉클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눈물 포인트’가 있다면, 나의 눈물 포인트는 아픔과 상처를 유머와 웃음으로 풀어내는 장면을 마주할 때이다. 이곳 문해 학교 할머니들의 삶이 참으로 그렇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그녀들의 이야기가 하나 둘 무대에 펼쳐지며 객석은 눈물 젖은 웃음으로 물들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지만 동화책을 읽어 달라는 말에 벌벌 떠는 영란부터, 어릴 적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춘심, 첫사랑의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인순, 그리고 딸을 낳은 것이 분하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진 분한까지. 네 할머니들은 가을 선생님의 말에 따라 각자 자신의 삶 속에서 찾은 시를 소개한다. 그 애달픔과 고단함이 묻어난 웃음에 마음 한 켠이 먹먹해졌지만, 극은 그렇게만은 놔두지 않겠다는 듯 상황을 언제나 유쾌하게 풀어내어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게 해 주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괴로운 날들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네 명의 할머니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극 중 인용되는 푸시킨의 시처럼 그녀들은 슬프고 괴로운 날들을 견디고 견뎌 기쁨의 날을 맞이한 듯 즐거워 보였다. 비록 그것이 거대한 기쁨은 아니더라도, 할머니들이 서로를 향하는 마음과 석구의 카메라 앞에서 놓았던 꿈을 다시 마주하는 모습에서 피어나는 삶을 견디게 해주는 단단한 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극은 늦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에도 글을 배우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는 용기를 주는 동시에, 삶을 살아가며 발견할 수 있는 일상 속 작은 기쁨과 설렘을 발견하는 과정 또한 담고 있었다.
이러한 할머니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석구의 모습 또한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처음에는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누가 궁금해하겠냐며 시큰둥하던 그였지만, 할머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차 진심을 읽게 되고, 나중에는 노래자랑에서 탈락한 춘심 할머니를 위해 먼저 무대를 마련해주고, 시 낭송 대회 참가를 제안하는 등 문해 학교의 일원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인다. 과하지 않고 담백하게 개입하며 할머니를 대하는 석구의 온기 어린 시선과 태도가 극을 더 따뜻하게 만들었다.
석구의 제안으로 참여한 시 낭송 대회에서 할머니들을 그토록 입어 보고 싶어했던 교복을 입고 무대 위에 선다. 한 명 씩 시를 말하는 할머니들의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 같아 마음이 뭉클해졌다.
결국 문해 학교는 예산 삭감으로 마지막 수업을 맞이하지만, 소풍을 나온 그들의 모습에는 어쩐지 아쉬움 보다는 충만한 기색이었다. '오늘을 살아갈 설렘을 찾아 시를 쓴다'라는 가사처럼,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며 발견한 소소한 설렘이 그들의 앞날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 넘버에서 영란 할머니가 부르는 '당신을 알게 되어서 참 좋다'라는 노랫말이 오래도록 귀에 맴돌았다. 자신을 가르쳐 준 가을에게 건네는 말인 듯하면서도, 마치 무대 위 모두를 향한 인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에서 극 내내 쌓여 온 따뜻한 연대와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크고 화려한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고단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어 내일을 향해 한 걸음 내딛을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오는 6월 28일까지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공연한다.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부모님 또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공연장을 찾아 실컷 울고 웃으며 따뜻함을 새겨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출처 - 라이브(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