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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늦어도 가장 찬란한 시들에 대하여 -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공연]

언제든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어요

by 김정현 에디터
2026.06.20 18:26

 

 

'가시나',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처럼, 이 뮤지컬은 시작부터 이미 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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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는 경북 칠곡의 작은 문해 학교에서 시작된다. 유년 시절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해 글자를 쓰지 못했던 할머니들이 뒤늦게 한글을 배우기 시작하고, 다큐멘터리 PD 석구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가을 선생님이 "우리, 시를 써봐요"라고 제안하면서 네 할머니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문해학교 속 가시나들은 시험이 어려우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고, 소풍을 가자고 조르는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 같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은 기나긴 세월의 무게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글자를 배운다는 것, 시를 쓴다는 것이 이 나이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할 수도 있지만 무대를 보다 보면 그런 질문이 슬며시 사라진다.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거고, 내 이야기니까 쓰는 거다.

 

네 할머니의 시는 거창하지 않다. 글을 모른다는 게 들킬까 봐 손주가 내민 동화책을 피해 부엌으로 숨어야 했던 영란, 가수의 꿈을 잊지 못해 노래자랑 지원서를 시로 써보는 춘심, 첫사랑이 읊어준 푸시킨의 시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온 인순, 아들을 낳지 못해 분하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 부끄러웠던 분한.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감정들이 서툰 글씨로 한 자 한 자 적혀 시가 되고, 그 시들이 무대 위에서 노래가 된다. 실제 할머니들이 직접 쓴 시 20여 편이 그대로 뮤지컬 넘버가 됐다는 걸 알고 나면 그 감동이 어디서 오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재밌는 건, 시는 소녀 같고 단정한데 막상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때면 갑자기 신나고 거침없는 노래들이 터져 나온다는 거다. 그 낙차가 웃기면서도 묘하게 시원했다. 노년의 이야기인데 낯설지 않고, 묵직한 사연인데 무겁지 않다. 그게 이 뮤지컬이 여러 세대를 한 공연장에 모이게 하는 이유인 것 같았다.

 

공연장에서 그 감정들이 무대 위에 펼쳐질 때, 비슷한 나이대의 관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자녀나 손주 세대는 자신의 부모나 할머니가 떠오른 듯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중장년층에게는 깊은 공감으로, 젊은 세대에게는 부모님 세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시간으로 각자 다르게 닿는 것 같았다. 거창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와닿는 감정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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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보는 내내 우리 할머니가 떠올랐다. 트롯을 좋아하시는 할머니는 마음에 드는 가수가 생기면 같은 노래를 끊임없이 부르시고, 일주일 전에 보여줬던 영상을 또 틀어놓고는 "참 노래 잘하지 않나" 하며 오랜만에 온 손녀보다 더 반긴다.

 

그러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책 한 귀퉁이를 찢어 내밀며 가사를 써달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꽂힌 트롯 노래들이었는데, 나만 쓴 게 아니라 다른 손자들도 저마다 써줬던 것들을 한데 모아 보관하고 계셨다. 몇 번이고 꺼내보고 또 보셨을 그 종이들을 보면서, 이렇게 글로 남겨 간직하고 되새겨본다는 게 괜히 귀엽고 애틋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게 내가 할머니를 위해 쓴 시였는지도 모르겠다.

 

가시나들 중 분한 할머니의 시는 이렇게 끝난다.

 

 

"구십에 글자를 배우니까 분한 마음이 몽땅 사라졌어요."

 

 

이 마지막 한 줄에 평생 이름조차 말하기 싫었던 사람이 글자를 배우고 나서야 그 이름과 천천히 화해하는 게 느껴졌다.

 

말로는 도저히 꺼낼 수 없었던 것들을 종이 위에 천천히 풀어놓으면서, 오래 묵혀둔 감정이 조금씩 정리되는 느낌. 글로 쓴다는 건 그런 것 같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안에 있던 것들을 한 번 꺼내보는 것. 꼭 잘 쓰지 않아도, 때가 딱 맞지 않아도, 그냥 쓰고 싶을 때 쓰면 그게 시가 되는 게 아닐까.

 

세상 모든 것이 시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모두 가시나다.

 


2026 오지게재밌는가시나들_공연사진(10)_제공 라이브(주).jpg

사진 출처 - 라이브(주)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다큐멘터리 영화 '칠곡 가시나들'과 에세이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을 원작으로 한 실화 기반의 창작 뮤지컬로,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연출상·극본상을 수상했다. 현재 서울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6월 28일까지 공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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