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괴물> 각본가 사카모토 유지의 희곡 <또 여기인가>를 보고왔다.
작품은 도쿄 외곽의 오래된 주유소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상처와 비밀을 지닌 네 인물의 대화를 따라간다. 이복동생을 찾아온 한 남자, 어딘가 불안정한 간호사, 무심하고 기묘한 아르바이트 직원, 그리고 아버지에게 주유소를 물려받은 점장. 이들은 한여름 밤의 주유소 안에서 끝없이 말을 이어가며 오래 묻혀 있던 감정과 관계를 서서히 드러낸다.
한 소극장에서 7:30분부터 120분간 이어진 연극. 강렬한 매미 소리가 나를 한여름으로 데려갔다. 더럽고 끈적한 세트장. 주인공인 점장은 연신 땀을 닦는다. 아르바이트 직원에게 말을 걸어도 거만하고 기묘한 직원은 점장에게 왜 혼잣말 하냐고 자신의 상사를 한껏 조롱한다.
곱슬머리에 수염 난 정장 입은 남자가 웬 여자 간호사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들어온다. 점장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스러워 하기보단 손님을 대접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 부끄러워한다. 그렇게 등장인물 넷이 모두 모인다.
점장임에도 그만한 지위를 가졌을 거라곤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의 위축된 자세. 상대방의 눈이 아닌 땅을 보며 말하는 태도. 상대방의 이야기보다 자기의 행동에 더 집중하는 모습. 등에서 저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다.라는 결론이 났다. 조금은 멍청하고, 그러나 순수해서 귀여운 느낌. 그게 주인공을 보는 내 첫 번째 인상이었다.
직원, 간호사, 그의 이복형 모두 흥미롭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었다. 그들의 몸짓과 상호 대사만으로 나는 그들의 성격과 본질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캐릭터들마다 내 주변의 인물, 나의 상황들을 이입할 수 있었다.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각본은 공감하기 편하다.
연극은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그것을 한정된 공간에서 얼마나 가성비 있게 보여주느냐가 연출의 능력이다. 이곳의 공간은 주유소 중간, 2층 방, 주유소 밖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유소 중간 외에는 관객들이 볼 수 없다. 그러나 소리는 들린다. 2층에서 내는 비명, 주유소 밖의 소리 등. 시간은 낮과 밤이 있다. 가장 특이했던 건 소파 뒤에 있는 한지로 만들어진 창문이었다. 밤에 일어난 사건은 그 한지 뒤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완전히 가린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보여주는 것도 아닌 연출. 상상하게 만드는 연출은 늘 상황을 더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돈이 들지 않는 상상을 활용한 연출은 정말 똑똑했다.
배우들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톤과 호흡은 각본을 충실히 표현했다.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관객의 몰입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렸다.
각본, 연출, 연기 이 세 가지가 준비되어야 우리는 비로소 몰입할 수 있다. 연극이 시작되고 30분부터 나는 이미 이 연극에 흠뻑 빠져있었다.
스포일러의 위험이 있기에 줄거리에 대해 자세히 말할 순 없지만 복선과 결말이 훌륭했다고 말하고 싶다.
“네가 참고 있는 것, 상상하는 걸 글로 적어.”
연극 마지막에 이복형이 동생인 점장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등장인물들 각자에게는 행동의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결핍이 설명한다. 인간은 서로가 있어야 결핍을 알고 치료할 수 있다. 우리는 감히 누군가의 결핍을 치료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남의 인생에 끼어들 때는 얼마만큼의 책임을 져야 하는 걸까. 그 모든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에게 끼어든다. 그것을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결과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인간관계란 그토록 복잡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서로에게 끼어들고 또 책임진다. 그것이 인간이 사랑하고 치유하는 방식이다.
등장인물 넷이 싸우고 지지고 볶는 모습을 보며 인간의 본성을 깨달았다. 한여름에 어울리는 연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