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벌거벗은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를 사람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해변에 엉거주춤 앉아있는 포스터와 ‘이탈리아’라는 키워드는 나의 어떤 감성을 자극했다.
몽글 몽글한 붓 터치가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걸까. 나는 19세기의 이탈리아가 궁금해졌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18세기부터 유럽의 예술가와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회자되었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본 예술가와 세상에서 가장 깊은 통찰력을 지녔을 지식인들이 인정한 도시는 어떤 도시인 걸까.
그들은 감히 마지막에 눈으로 담을, 가슴으로 만끽할 무언가를 ‘나폴리’라 말했다.
그런 나폴리의 정서와 풍경은 19세기 회화 속에 구현되어 있다.
마이아트뮤지엄과 이탈리아 국립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과 협력하여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19세기 컬렉션: 나폴리를 거닐다] 전시를 2025년 8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개최한다.
다음은 해당 전시를 설명하는 말을 인용한 글이다.
“이 시기의 작가들은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를 거쳐, 서민과 하층민 등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베리즈모(Verismo)까지 다양한 표현 방식을 시도했다. 특히 베리즈모는 프랑스 사실주의와 유사하면서도, 이탈리아 남부 특유의 사회 구조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탈리아 국립 카포디몬테 미술관을 잠깐 소개하자면 카포디몬테 미술관은 나폴리 시내와 해안을 조망할 수 있는 언덕 위에 위치한, 이탈리아 남부 최대 규모의 국립 미술관이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약 47,000점에 달하는 방대한 예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마이아트뮤지엄은 삼성역에 인접한 도심 속 대형 미술 전시 공간으로서, 수준 높은 공간 구성과 색 조합으로 늘 나의 눈을 즐겁게 해준 곳이다. 입구 초입에서 검정 배경 위에 유려한 세리프체로 쓰인 글씨와 포인트를 주는 핀 조명이 강력하게 이 전시의 집중도를 높이며 시작할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해당 전시는 19세기 나폴리를 다뤘으며 19세기 나폴리는 군주제에서 이탈리아 통일로 이어지는 역사적 전환기를 겪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대 속에서 회하는 변화하는 사회의 기록이었다.
전시를 보면서 역사적 사건이 회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예술가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그 변화를 한눈에 담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몇 가지 나의 눈을 사로잡는 명화들을 가져와보았다.
구스타보 나차로네 (1831- 1929)
<하렘의 어느 구석이든 이와 같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사실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을 받은 구스타보 나차로네의 회화 양식을 잘 보여준다. 조명은 화면 전체에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하며, 긴 흑발과 붉은 산호 목걸이, 흰색 베일이 어우러진 여인은 부드러운 베개 에 몸을 기댄 채 나른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다.”
이 작품 앞에 섰을 때 그녀의 부드러운 살결과 오묘한 분위기의 표정이 날 단숨에 사로잡았다. 멀리서 흘깃 보았을 때 나는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다른 작품을 건너뛰고 이 작품 앞에 홀린듯이 설 정도였다. 그만큼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그림임에 분명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예술가들이 여성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글귀였다. 동시에 굉장히 공감 가는 말이었다. 어째서 이 전시회의 여성들이 모두 아름답고 신비롭게 그려졌는지 이해가 됐다.
빈첸초 아바티 (1803 - 1866)
<부엌 내부>
“해당 작품은 대형 주방의 구조와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포착한 아바티의 대표작이다. 측면 창으로 스며드는 자연광은 사물의 형태와 질감을 뚜렷하게 드러내며, 질서 정연하게 놓인 냄비의 조리 도구들은 세밀한 묘사와 재질 표현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졌다.”
19세기 회화는 전통적 주제에서 벗어나 가정의 일상과 사람들의 삶을 반영해 나가기 시작했던 점처럼 해당 작품은 부엌 내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데 굉장히 집중했다.
그 묘사는 아무 치밀하고 정확했다. 현대적으로 설명하자면 확대했을 때 픽셀이 안 깨질 정도의 고화질이었다.
그 생생함에 놀라 더 가깝게 다가가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도구 하나 하나를 뜯어 보았을 때 기본 한시간을 구경할 수 있을 정도의 작품이었다.
“포실리포의 화가들은 현실에 기반하여 광활한 지중해의 풍경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힘에 이끌렸다. 이러한 태도는 해변의 밧줄공이나 바닷가의 아이들과 같은 일상적 장면을 그린 작품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빈첸초 카플릴레
<해변에서>
그리고 이내 지중해의 그녀를 만난다. 남자로 보았던 첫인상과 달리 가까이 보니 그가 아닌 그녀였다. 그리고 저 멀리 우스꽝스러운 남자까지. 어떠한 의도나 연출도 없이 이것은 나폴리의 한 일상이었다. 평화로움과 일상 속 은근한 서스펜스까지. 그녀의 자세에서는 일촉즉발의 역동성이 엿보인다.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우리는 다시 이 말을 곱씹어 본다. 사실 그림만으로는 나폴리가 그토록 아름다웠나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문득 이 전시에는 절망이 없다는 게 느껴졌다. 나폴리에는 절망과 우울이 없었다. 역설적으로 나폴리란 도시는 얼마나 아름답고 평화로운 도시였기에 그랬을까 싶었다.
아 절망이 없는 도시 나폴리! 너무도 아름다운 해변과 신비로운 여성들이 있는 나라 이탈리아.
그 평화로움과 이색적인 아름다움을 즐기고 싶다면 이번 전시를 꼭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