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는 존재라 할지라도.
역사에서 지워지면, 그는 처음부터 없는 존재가 된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 역시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황제펭귄, <검술명가 막내아들> 14권 6화 中

illust by 아현(雅玄)
어제부로 모든 과제와 발표가 끝났다. 이제 종강까지 남은 것은 시험 뿐이다.
겨울방학, 이번 학기 시간표를 계획할 때였다. 내 시간표를 본 거의 모든 학과 선배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했다. 6전공. 그중에는 우리 학과에서 가장 힘들다는 수업 중 하나도 있었다.
한국근현대사.
선배들은 그 수업이라도 제외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나는 온갖 염려와 걱정을 떨치지 못하면서도 강행했다. 한국의 근현대. 특히 일제강점기의 역사는 사학과에 입학해서 제일 배우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에.
물론 6전공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나마 여유로울 학기 초에는 답사준비위원회로 활동하며 발표할 소논문을 작성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고3 때도 마신 적 없는 커피를 대학교 3학년이 되어서 처음 마셨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평소 음료 마시듯 쭉 들이키는 바람에 동아리 선배가 그거 그렇게 마시는 거 아니라며 황당해하기도 했다.
한국근현대사는 특히 품이 많이 들었다. 과제는 둘째치고 시험 문제가 예상이 안 됐다. 신입생 시절 같은 교수님께 한국사입문 강의를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암기와 사고를 동시에 요하는 교수님 특유의 문제 출체 방식은 유독 난해했다. 하지만 수업 중간중간 학생들에게 제시하시는 질문은 그럼에도 한국근현대사 수업을 듣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게 해주었다. 그건 평소의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들이었다. 공교육 역사의 틀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내게, 교수님께서 보여주시는 방향성은 때로 새롭고 낯설게 다가왔다.
마지막 수업은 몸이 좋지 않아 결석했지만 친한 선배가 필기를 빌려준 덕분에 교수님 설명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그날 교수님은 한 학기 강의를 마무리하며 '역사'에 대해 말씀하셨다. 중세 시대의 역사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 근대의 역사학은 현재를 이해하려는 목적에서. 그렇다면 2026년 한국은 어떤 이들의 길에 의해 만들어졌는지에 관해서도. 역사의 역할과 가치, 성장과 비판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설명인 동시에 질문이었다.
역사는 왜 필요한가. 어째서 중요하고, 실은 위험한가. 어긋나고 잘못된 기록은 무엇을 지우고 잃어버리게 만드는가.
사실 역사를 배우다 보면 '지워진' 이름과 목소리들을 정말 많이 만나게 된다. 비단 한국사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동양사도 서양사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목소리를 발굴하고, 이름을 호명하며,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 위한 여정은 그 자체로 역사학의 존재 이유와 맞닿아 있다. 동시에, 고립되고 왜곡된 역사가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그 아래 지워진 이들의 존재를 통해.
그러니 우리는 때로 기억해야 한다. '그'가 쉽게 지워질 수 있도록 망각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한켠쯤에는 지나간 것들을 되새기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