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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나의 필승 넘버들 [음악]

아, 이 넘버 때문에

by 손현진 에디터
2026.06.12 19:29

 

 

'뮤지컬 넘버'는 크게 보면 음악의 한 갈래지만 단순히 음악이라고 칭하기에는 어려운 어떤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다. 넘버 앞뒤로 강렬한 장면, 그러니까 서사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 넘버를 부르는 주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겪었는지 관객이 직접 목격했다는 점도 그렇다. 뮤지컬에서는 당연히 넘버를 빼놓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스토리만큼이나,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넘버는 내게 있어 특히 '설득의 언어'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단순히 대사로만 전했을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던 것들이 음악과 가사가 더해질 때 비로소 마음을 움직인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내게는 몇 가지 필승 넘버가 있는데, 그중 나의 마음속 서랍장에 간직해 온 몇 가지 곡들을 소개해 본다.

 

 


꽃봉오리 -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


 


 

 

<여신님이 보고계셔>는 6.25 전쟁 시기, 우연한 사고로 함께 무인도에 고립된 남한군과 북한군의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생존을 위해 잠시 힘을 합치기로 한 그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여신님'을 상상하며 고된 하루하루를 버틴다.

 

그리고 극 중 '석구'의 여신님은 전쟁에 징집되기 전 사랑을 고백했던 한 '누나'다. 그러나 누나는 석구와 자신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고, 결국 돌아가라며 그의 등을 떠민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떠올리면서도 그것이 석구에게 있어 가장 빛났던 시절이라는 게. 그리고 그 기억 속 누나를 자신의 여신님으로 상상하며 여전히 하루를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저릿하게 만든다. 시들어 버렸을지라도 그마저 좋아 놓아줄 수 없다는 석구의 기억 속 한 장면이 무대 위에 펼쳐질 때, 배우의 목소리를 타고 떠다니는 아릿한 가사가 귀에 박힌다.


 

수줍은 인사에 싹을 틔워

마주한 눈빛에 잎이 나서

어느새 훌쩍 자라난 꽃봉오리

전하지 못해 피어날 수 없는

꽃봉오리

 

 

석구는 자신의 여신님을 그려야 하는 상황에서 '누나'를 떠올린다. "입술 옆에 작고 귀여운 점이 하나 있어요. 얼굴은 하얗고, 웃을 땐 환하고." 그런 대사와 함께 흐르는 반주는 석구를 과거로 데려간다. 석구는 누나와의 사랑을 만개한 꽃이 아닌 피어나지 못한 꽃봉오리에 비유한다. 누나와 마주친 눈빛으로 틔운 싹이 무럭 자라 꽃봉오리가 되었지만,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해 만개하지 못했던 사랑 말이다.

 

전개되는 상황 뒤로는 어느덧 동료들이 코러스로 분해 그들의 사랑을 지켜본다. 쌓이는 화음 사이로 석구와 누나의 헤어짐, 그리고 전쟁의 한복판에 징집된 상황까지 펼쳐지면 자연스럽게 넘버의 끝이 다가온다.

 

 

숨겨온 빛깔을 알기 전에

아껴둔 향기가 닿기 전에

시들어 끝내 져버린 꽃봉오리

 

 

품었던 꽃이 어떤 색이었는지도 알 수 없게, 아껴두었던 향기를 전하기도 전에 이미 져버린 꽃봉오리를 노래하는 석구와 여신님,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코러스를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넘버는 끝이 나고 무대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나는 이럴 때마다 뮤지컬이 주는 마법 같은 순간을 체감한다. 흐르는 노래 위로 쌓이는 가사를 듣다 보면 어느새 무대는 시간을 초월해 순식간에 과거가 되고, 다른 공간이 되고, 다른 인물이 된다. 영상 매체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오직 무대만이 줄 수 있는 생동감. 바로 이게 내가 뮤지컬을 사랑하는 이유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의 '꽃봉오리'는 그 순간을 가장 강렬하게 체감하게 만드는 넘버이며, 꼭 직접 공연장에서 봐야만 하는 넘버이기도 하다. 이미 여러 번 관람한 경험이 있지만, 이 넘버만큼은 볼 때마다 늘 새롭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꽃봉오리는 나의 필승 넘버다.

 

 

 

웨스턴 스토리 - 뮤지컬 <웨스턴 스토리>



 

 

한편,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뮤지컬 <웨스턴 스토리>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놓인 술집 '다이아몬드 살롱'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을 다룬 작품이다. 그중에서도 오프닝곡인 '웨스턴 스토리'는 넘버 하나만으로 작품의 배경과 캐릭터 설명을 끝내버리는 아주 영리한 곡이다.

 

실제로 이 공연을 처음 보러 갔을 때가 떠오른다. 관객석에 앉아서 막이 오르는 걸 지켜보고 있었는데, 이 극은 시작과 동시에 제목이 가진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그대로 보여주듯 서부 하면 떠오르는 음악의 향연을 들려주었다. 익숙한 '아아아아아-' 소리, 총소리, 그리고 기차 경적 소리까지. 금방이라도 말을 타고 달려야 할 것 같은 음악 뒤로 극장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인물들이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무대 위로 모인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넘버가 시작된다.

 

 

서부! 황량한 사막 무한한 가능성

수많은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노리는 곳

카우보이 인디언 살인마에 도둑까지

저마다의 황금을 얻기 위해

프로스펙터가 되는 이곳

나는 뭘 위해

 


모든 인물이 모여 합창하는 모습을 보면서 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래. 이게 뮤지컬이고, 이게 무대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3분 남짓한 이 오프닝 넘버만으로 대학로에 있던 관객을 순식간에 서부로 데려가는 마법 같은 힘 말이다. 그리고 이 넘버는 단순한 초대에서 그치지 않는다. '웨스턴 스토리'라는 넘버는 모든 인물의 '아이원트송'이 되기도 한다. 

 

아이원트송은 인물이 가진 욕망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낸다. 스토리텔링에 있어서는 인물의 욕망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결국 그 욕망, 목적, 목표가 플롯을 끝까지 끌고가는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뮤지컬 <웨스턴 스토리>의 오프닝 넘버는 앞선 가사에서도 나온 것처럼 '나는 뭘 위해 여기에 왔는지'를 노래하며 각 인물의 목표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한다.

 

빌리는 '복수', 조세핀은 '꿈', 조니는 '생존', 그리고 와이어트는 '더 나은 내일'을 노래한다. 이들이 왜 그런 목적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극이 전개되면서 차차 밝혀지긴 하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저들이 왜 저걸 위해 모였을까?"라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는 것만으로도 이 넘버는 충분히 제 역할을 다 한 것이다.

 

이 넘버를 나의 필승 넘버로 꼽은 이유는, 오프닝만으로 이 작품이 가진 성격과 배경, 그리고 인물까지 효과적으로 드러냈다는 점도 있지만, 관객석에 앉은 사람들이 다같이 무대에 몰입해 들썩였던 그런 감각이 몸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올해 7월에 돌아오는 뮤지컬 <웨스턴 스토리>에 관심이 생겼다면, 특히 신나는 음악과 유쾌함 가득한 뮤지컬을 찾고 있다면 한 번 관람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은하철도에 몸을 싣고서 - 뮤지컬 <은하철도의 밤>


 

 

 

뮤지컬 <은하철도의 밤>은 동명의 소설을 모티브로 한 공연으로, 앞을 못 보는 소년 '조반니'의 성장을 담고 있다. 은하수 축제의 날, 불의의 사고로 정신을 잃게 된 조반니는 허공을 달리는 은하 열차에서 눈을 뜬다. 그의 친구 '캄파넬라'는 자신을 은하 열차의 승무원이라 소개하며,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나만의 필승 넘버를 꼽다 보니 비슷한 경향성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넘버는 결국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할 때 펼쳐지는 곡들이다. 내가 뮤지컬에 바라는 것은 '다른 세계로의 초대'이다. 지긋지긋한 현실을 벗어나 발걸음을 옮긴 이 공연장 안에서만큼은 나의 현실이 아닌 다른 세계에서 인물들과 함께 한바탕 사건을 겪고 새로운 하루를 보내고 싶은 마음. 그런 의미에서 뮤지컬 <은하철도의 밤>은 그런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켜주는 작품이었다.

 

특히 '은하철도에 몸을 싣고서'라는 넘버는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주인공 '조반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실에서 벗어나 낯선 은하 열차를 타고 우주를 날아간다. 객석의 관객들 역시 조반니와 마찬가지로 아직 그 세계관에 완전히 편입되기 전인 시점이다. 그때 흐르는 이 넘버는 조반니뿐만 아니라 관객까지 우주라는 공간으로 이끈다.


 

은빛의 하늘 억새가

물결처럼 흔들리는

하늘 들판 그 위로

우린 달려가고 있어요

 

 

이러한 은하의 공간을 구현하기 위해 무대 위에는 환상적인 조명과 영상 연출이 펼쳐진다. 그리고 그 무대 위를 가로지르는 배우들을 보며 관객은 서서히 이 세계관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스쳐가는 불빛들... 흩날리는 섬광들... 그 사이로 '우리는' 정말 날아가고 있다. 배우가 외치는 '치치, 치치, 치치키'라는 주문 같은 가사를 속으로 외고 있으면 이제는 인정하게 된다. 나는 이제 이 세계에 완전히 빠져들었음을.

 

 

시원한 바람

설레는 가슴

빛 속을 달리는

은하열차

 

 

비록 상상일 뿐이지만. 꽉 막힌 공연장 안에서 진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고, 섬광 같은 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다른 요소들도 분명 존재하지만 특히 뮤지컬은 음악, 즉 '넘버'라는 장치를 활용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나는 그게 뮤지컬만이, 무대 예술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특별한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조반니의 대사를 빌려 말하자면, 이 넘버를 들을 때만큼은 "정말로 하늘 들판을 나는 기분"이다.

 

결국 내 마음속 서랍장에 담긴 필승 넘버들은, 극장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지운 뒤 나라는 사람을 기꺼이 다른 차원의 이야기 속으로 데려간다. 무인도에 피어난 애틋한 사랑이든, 황량한 사막의 유쾌한 욕망이든, 우주를 가로지르는 은하 열차든 말이다. 삶이 팍팍하게 느껴질 때,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혹은 완벽한 환상이 필요한 순간에. 나는 다시 공연장을 찾아 이 마법 같은 넘버에 기꺼이 마음을 내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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