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캐릭터 해석의 줄임말인 이 단어는 보통 사람의 성격, 습관 등을 분석하여 인물이 가진 특징을 해석해낼 때 쓰는 말이다.
최근 수업에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떻게 보고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나는 남의 시선을 굉장히 많이 신경 쓰는 사람이기에 남들이 해주는 나의 이야기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재밌게 들었는데, 사람들의 이야기 안에 '여린 사람'이라는 말이 생각보다 많이 담겨 있었다. 나름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10개 중 하나만 내비쳐도 이렇게 바로 읽혀버리는 연약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순간 속상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속상함이 여린 것 자체에서 온 건 아니었다. 나는 내 여림이 싫지 않다. 여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작은 부분들을 발견하고 마음을 쓸 수 있고, 그건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도 잘 맞는다. 속상했던 건 여림이 들켰다는 것보다, 내가 허락하지 않은 모습이 노출되었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나는 준비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고, 여린 부분도 그런 의미에서 아직 내가 스스로 허락하지 못한 모습인 것이다.
그 경험을 지나면서 한 가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나는 생각도 많이 하고 성찰도 꽤 하는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림, 걱정 많음, 불안 같은 본질적인 성질들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어떨 때에는 그게 무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최선이 닿지 않는 선이 있다면 그때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고.
하지만 어쩌면 그건 안 바뀌는 게 아니라 내가 기대한 속도와 다를 뿐, 아주 조금씩은 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사람의 본질적인 성질이 쉽게 바뀌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결이고, 오랜 시간 많은 걸 나만의 방식으로 겪고 해결하며 쌓여온 것이니까.
사람의 결이란 말은 곧 사람마다 고유한 분위기와 무드가 있다는 걸 의미한다. 같은 예민함을 가졌어도 어떤 사람에게서는 그게 섬세함으로 읽히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날카로움으로 읽힌다. 같은 여림을 가졌어도 어떤 사람에게서는 그게 깊이로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불안정함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결국 그 성질을 부정하고 없애려 하느냐, 아니면 인정하고 다루려 하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걱정 많음이라는 성질도, 그게 나 자신을 향해 쓸데없는 불안으로 소모될 때는 분명 짐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같은 성질이 바깥을 향해 타인에 대한 걱정과 따뜻한 시선으로 흐를 때는 오히려 나만의 색깔이 된다. 성질 자체가 바뀐 게 아니다. 그 에너지가 어디로 흐르느냐가 달라진 것뿐이다.
내가 오랜시간 부러워해온 사람들이 있다. 길을 걸을 때 천천히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 함께 있던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워도 바로 핸드폰을 켜지 않고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사람, 글을 읽을 때 한 단어 한 단어의 의미를 천천히 의식하며 읽는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본인만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 여유가 단순히 타고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이 어떤 성질을 가진 사람인지 알고, 그것을 오래 다뤄온 시간이 쌓여서 만들어진 분위기일 것이다. 그게 그 사람만의 무드가 되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성숙함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나의 여린 부분들을 없애고 싶은 게 아니다. 그것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다.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을 만큼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사람.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의 페이스를 잃지 않는 사람.
그게 내가 생각하는 단단함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