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년 5월에 개봉한 영화 <백룸>의 시작은 2019년 커뮤니티 플랫폼 ‘4chan’의 한 스레드에 올라온 이미지 한 장에서 퍼진 괴담에서 시작되었다. 낡고 오래된 벽지가 가득한 텅 빈 방의 사진 한 장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게임 속에서 벽을 뚫고 버그처럼 빠져나가는 현상인 ‘노클립 현상’처럼 되어 이 공간에 갇힌다는 설정을 시초로 수많은 2차 창작물을 배출해냈다.
2022년 ‘케인 파슨스’가 유튜브에 올린 백룸에 관한 단편 시리즈가 조회수 8,440여만 회를 돌파할 정도로 대히트를 쳤고, 그의 나이 16살이었다. 이를 발견한 제작사 A24가 2023년 영화화를 제안했으며 2026년 케인 파슨스는 A24 역사상 최연소 감독, 20세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박스오피스 1위 감독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감독 케인 파슨스의 유튜브 시리즈는 백룸의 통로를 발견해낸 기업 Async에 대해 중점적으로 스토리를 끌고 나가는 반면 영화에서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며 ‘백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중심으로 영화를 풀어 나가고 있다.

폐업 직전의 가구점을 운영하는 ‘클락’은 건축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가구 판매점 사장이다. 오스만 제국의 선장으로 가구점 콘셉트를 잡은 그는 미국 사람들의 친근감을 이끌어내는 라이벌 가구 상점의 서부 콘셉트를 보며 장사가 잘되지 않는 원인을 찾지 않고 그저 화만 낸다. 그의 불만 가득한 태도는 집에서도 받아들이지 못해 아내와는 별거 혹은 이혼을 한 상태이며, 아무도 오지 않는 가구점에서 마치 그의 가구처럼 멍하니 앉아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하는 노력은 심리상담가 ‘메리’를 만나러 가는 일이다. 메리는 역할극을 통해 클락의 심리를 스스로 돌아보게끔 하는 듯싶지만, 클락은 나아지지 않고 어쩐지 불평불만만 가득하다. 뻔한 말들로 그를 대하는 메리의 상담에도 적극성은 없어 보이는 것이 두 사람의 상담엔 소통이 되지 않는 듯싶다.
이쯤 되면 메리의 상담 능력에도 의심이 갈만한데 그녀에게 클락 외에 상담을 받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녀 또한 어린 시절 엄마와의 불운한 가정사로 과거의 트라우마에 얽매여 있다. 메리는 상담 테이프를 통해 항상 ‘창밖으로 나오세요’라고 말하지만 정작 본인은 환한 대낮에도 커튼을 치고 있을 만큼 심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클락과 과거에 매여있는 메리가 우연히 발견한 이 세계 ‘백룸’에 들어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사람들의 기억으로 공간이 구성된다는 백룸은 두 사람이 발을 딛는 순간부터 차이를 보인다. 처음 클락이 백룸에 들어가게 되었을 땐 수많은 가구들이 산처럼 쌓여져 있었고 메리의 백룸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인생에 있어 실패를 맛본 두 사람이지만, 클락의 가구들은 그의 못다 한 꿈에 대한 열망과 열등감을, 메리의 텅 비어있음은 상실을 의미하고 있는 듯하다.
벽과 문, 천장의 등까지 모두 네모난 이 노란 공간은 낯선 기괴함을 주며 기존 미스터리 장르와는 반대되는 밝은 대낮 같은 미장센을 보여주고 있다. 건축가가 꿈이었던 클락은 무한으로 이어지는 이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느낀다. 그는 오랜 기간 백룸을 탐험하며 지도까지 그릴 정도로 공간에 매몰되어 있었고,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사람들을 동원한다. 반면 클락을 찾기 위해 나선 메리는 백룸에 들어선 순간부터 긴장감을 놓지 못하는데 어딜 둘러봐도 창문이 없는 이 공간은 메리가 주장하는 심리학적 관점에선 출구 없는 트라우마 같은 공간처럼 느껴진다.

백룸의 핵심적인 특징은 ‘공간에 오래 머문 인간의 뇌와 기억을 방이 복사한다’는 점이다. 같은 공간에서도 클락은 못 이룬 꿈의 도시를, 메리는 끝없는 상실의 방을 마주하고 있다. 클락의 열등감은 더욱 깊게 파고들어 수많은 방들을 만들어 내고 결국 기괴하게 일그러진 형태의 괴물들이 탄생 시켰다. 그들은 복제에 실패한 듯 여러 개의 눈 코 입을 갖고 있으며, 가구점 사장이던 클락의 현재를 투영하듯 목재와 솜 등으로 만들어져 있다.
메리의 심리 상담 방에서 억지로 역할극을 하던 두 사람은 백룸에서 상하관계가 뒤바뀐다. 이는 심리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린 클락이 공간 전체를 좌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잡히지 않는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현실에서는 잃었던 사회적 권위를 되찾았다 생각하는 클락은 메리를 겁박하며 그녀의 이성이 완전히 무너지게 만든다. 심리 상담가라는 직업적 윤리를 포기하면서까지 클락에게 구제불능이라며 소리치는 그녀의 모습 또한 클락처럼 스스로의 미로에 갇히는 것처럼 보였다. 클락이 만든 미스터리한 세계에서 과연 메리는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을까? 그리고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05년생 감독에게 가장 놀라운 점은 백룸에 대한 정의를 정확하게 말로 전달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클락의 잃어버린 이성과 메리의 상실감의 공포를 끝없이 펼쳐지는 공간으로 시각화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의하고 느끼게 하고 있는 점에서 영화적으로 뛰어난 연출을 보여주고 있다. 또 ‘파운드푸티지(우연히 발견된 출처 불명의 영상) 설정을 영화 중간에 도입하여 심연으로 향하는 클락의 심적 상태를 긴장감 있게 표현하여 관객의 집중력을 잃지 않게 하고 있다.
어쩌면 감독은 백룸이란 이미지 한 장으로 수많은 괴담을 만들어 냈듯이 이 영화 또한 다양한 해석을 나눌 수 있는 또 다른 소통의 창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백룸에 대한 수많은 2차 창작물에서 그의 작품이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흥미로운 가십들을 넘어선 깊은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케인 파슨스 감독은 백룸의 장편 옴니버스 확장을 계획했으며, 협업할 각본가를 찾고 있다 전했다. 무한히 증식하는 그의 다음 세계가 무척이나 기대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