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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예술은 우리에게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다 - 파리의 작은 미술관 [도서]

눈을 감고 그려보는 파리의 풍경

by 손현진 에디터
2026.06.11 13:20

 

 

미술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분야인 전시는 항상 어렵다는 인상이 강했다.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을뿐더러 크게 관심이 가지 않는 분야였기 때문이다. 특히 광활한 전시장 안에 들어가 어떤 작품을 앞에 두고 서 있을 때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하지? 내가 여기서 느껴야 하는 건 뭘까?'라는 압박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전시만큼은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막연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 책을 만났다. <파리의 작은 미술관>. 무엇보다 표지에 적힌 글이 흥미를 끌었다. "예술가의 길을 따라 걷는 파리 골목길 산책"이라니. 예술가의 숨결과 온기가 그대로 살아 숨 쉬는 거리를 부담 없이 산책하는 일. 책의 저자와 함께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보다 보면 어렵지 않게 미술을 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나는 굳게 쌓인 나의 편견을 허물기 위해 이 책을 펼쳐 들었다. 접근조차 힘들 거라 여겼던 미지의 영역을 향한 작은 도전이었다.

 

 

 

작은 미술관을 찾아 골목길로


 

저자인 김정화 작가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문학과 미술사를 수학했다. 오랜 시간 파리에서 생활하며 예술을 보는 방식에 대한 고민을 이어왔다고 한다. 작가는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밝힌다. "미술관에서 백과사전을 훑어보듯 정신없이 보내고 싶지 않다면, 작은 미술관을 찾아 골목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이 문장을 보자마자 마음이 뜨끔했다. 나 역시 유명한 대형 미술관을 찾아갔을 때, 모든 작품을 다 봐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여 단 한 작품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털레털레 걸어 나온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 거기는 가 봤지'라는 뿌듯함 뒤에 따라온 공허함은 여전히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파리의 작은 미술관] 입체표지.jpg

 


하지만 파리의 골목길에 자리한 작은 미술관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기존의 백과사전식 정보 전달과는 다른 방식의 전개를 보여 주었다. 지식을 나열하기보다는, 그 공간에 얽힌 예술가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풀어내며 독자를 파리의 뒷골목으로 끌어당긴다. 그렇게 역사의 틈새를 흥미진진하게 비집고 가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생생한 풍경이 펼쳐진다. 예술가들이 온몸으로 부딪혔던 길과 공간을 짚어가는 저자의 목소리, 그리고 마침내 그 골목을 함께 누비는 나의 뒷모습까지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다. 그 앞에 잠시 현실을 내려놓고 예술적 감각에 온전히 몰입하는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해방감을 맛보았다.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주는 그들의 삶과 그림은 텍스트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각기 다른 빛깔을 간직한, 여덟 개의 미술관


 

저자는 파리에 있는 루브르, 오르세, 퐁피두 등의 대형 미술관을 이야기하는 대신 파리의 거리를 누비며 알게 된 예술가들의 삶과 이야기, 그들의 고뇌에서 비롯된 작품 세계를 유려하게 끌고 간다. 지하철역에서부터 골목길로 이어지는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문장들을 읽다 보면 절로 그 거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상상력을 동원해 저자가 이끄는 대로 홀린 듯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작은 미술관 앞에 당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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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미술관에서 시작된 발걸음은 마르모탕 모네, 로댕, 귀스타브 모로, 몽마르트르, 피카소, 르코르뷔지에 미술관을 거쳐 자코메티 미술관에서 끝을 맺는다. 저자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이나 인상주의의 대두 등 당대의 치열했던 예술적 논쟁과 정통에 대항한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함께 펼쳐낸다. 회화뿐만 아니라 건축, 조각 등 다양한 분야에 평생을 바친 예술가들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들을 이토록 치열하게 만든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경외감마저 든다.

 

특히 각각의 예술가들이 남긴 방대한 작품들과 마주할 때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정도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통해 자신이 믿는 예술을 증명하고자, 혹은 증명을 위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끊임없이 투쟁한 이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밴 파리의 골목길을 활자 위로 조용히 거닐다 보면, 도시가 간직한 예술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림 안에는 찰나의 순간이


 

'그림 안에는 찰나의 순간이, 그 안에는 예술가의 철학이.' 

 

책을 읽는 도중, 노트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앞서 전시가 항상 어려웠다고 고백한 이유는 작품을 보고 무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통해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작품 안에는 예술가가 포착하고자 했던 찰나가 깃들어 있으며, 그 찰나의 순간에는 예술가의 철학이 응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는 작품 앞에 섰을 때, 정해진 답을 찾는 대신 그 찰나와 철학을 조용히 느껴보고자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예술가의 찰나와 철학이 담긴 화폭은 꼭 직접 마주하고 싶다고 열망하게 만든 작품이 있었다. 그건 바로 클로드 모네의 <인상, 해돋이>였다. 책장을 넘기다 불현듯 눈이 마주친 그 그림 앞에서 나는 자연스레 탄성을 내뱉었다. 인쇄된 종이 위 평면적인 이미지일 뿐인데도 이토록 아름다운데, 실제로 마주한다면 얼마나 경이로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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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루이 질레가 모네의 또 다른 작품 <수련>에 대해 남긴 글, "우화도 없는... 알레고리도 없는... 육체도 없고 얼굴도 없는... 단지 색감의 힘으로만... 분출일 뿐..."이라는 문장을 읽은 뒤 마주한 그림이기에 그 진폭이 훨씬 강하게 다가왔다. 저자는 이 그림을 두고 "크고 굵은 붓질이 화면을 쓸고 지나간 듯하기도 하고, 얽히고설켜 있는 붓 자국이 혼란하기도 하다"라고 묘사했다. 모네는 도대체 왜 그토록 거친 찰나를 이 그림 속에 담았을까. 언젠가 반드시 그 작은 미술관의 골목을 찾아가, 직접 그림을 마주하고 그 생생한 감각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졌다.

 


 

페이지를 넘기면,


 

<파리의 작은 미술관>은 사진과 글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책이었다. 특히 어떤 작품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읽으며 머릿속으로 나름의 인상과 이미지를 덧칠하다가, 다음 페이지에 인쇄된 실제 작품의 사진을 마주할 때면 내가 상상한 것과 실제가 어떻게 맞닿고 어긋나는지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곳곳에 적절히 배치된 사진들은 그 공간을 실감 나게 전해주었다.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낯선 도시 '파리'는 어느덧 금방 닿을 수 있을 것처럼 친숙해졌다. 그러다 보니 활자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공백, 그 '실재하는 감각'을 온전히 마주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언젠가 파리의 골목길에 섰을 때, 이 책을 읽은 기억이 되살아나 반갑게 맞이해 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은 어디일까. 스스로에게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떠오른 대답은 책의 마지막을 장식한 '자코메티 미술관'이었다. 이 파트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찍은 흑백 사진으로 시작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알레지아, 파리, 1961>. 비 내리는 거리를 가로지르는 한 남자. 구부정한 자세로 찻길을 건너는 자코메티의 찰나를 포착한 이 사진은 자연스럽게 그의 작품 <걷는 남자>를 환기한다. 저자는 <걷는 남자>를 두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단지 '걷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움직임과 공간,

그리고 그 사이에 흐르는 시간까지 함께 있었다.

더 나아가 그 조각과 내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순간,

전시실의 공기 자체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오브제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였다.

 

 

자코메티는 작가와 동떨어진 모델을 '내 공간 속에 실존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이 바라보는 공간 전체를 포함한 현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를 점점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자코메티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예술을 표출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 깎아낸 결과물이 수십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지금의 나에게까지 어떤 타격을 준다는 사실, 그 동시대성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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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무언가를 느끼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해'라는 시도 앞에 번번이 미끄러져도 상관없다.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그들의 생애와 그가 걸었던 길을 가만히 상상해 보는 것. 그러다 보면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그 작품이 내 안으로 스며드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피카소는 예술이 우리에게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예술은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허구일지 모르나, 우리는 그 거짓말을 경유해 어떤 진실에 가닿을 수 있다. 언젠가 파리의 작은 골목길에서 나 역시 진실 하나를 기꺼이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소망도 잠시 내비쳐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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