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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가리워진 것 - 로테/운수

낭만이란 맹목 뒤에 가려진 것들

by 서상덕 에디터
2026.06.04 11:14

 


낮에 회사에서 듣게 되었다, 옆 팀으로부터, 정말이지 느닷없이 날아드는 소식이었다. 고객사인 D사의 채권 회전이 막혔다느니, 지급명령 소송을 제기한다느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들어왔으나, 마침내 회사 부도처리가 진행되고 있단다. 채권 회수를 담당하는 영업 쪽 팀장은 보고자에게 따지듯 다그쳐 묻는다, 마치 그를 쥐어짜면 D사에서 돈이라도 나올 것처럼. 담보로 잡을 만한 것은 없더냐 팀장 물으시고, 정녕 마땅찮았던지 담당자는 대표의 오피스텔에나마 겨우 근저당을 잡았다고 말한다.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젊은 대표였다. 나랑 한 살 차이였나, 대표라는 직함이 아직은 맞지 않는 양복처럼 어색해 보였다. 그는 코로나 시국에 냉동 디저트 회사를 차렸고, 카페 납품이 주 거래선이었다. 한편 물류센터의 출고 프로세스는 전일 오후 배송 주문을 마감해서 야간에 출고 준비를 한 다음 익일 새벽에 출하하게 되는데, 그는 1주일에 세 번 가량 당일 오전 출고를 해줄 수 없겠느냐 물어왔다. 창고 규정상 편의를 봐주기 어렵다고 회신하면 곧, 어리숙한 그 대표가 직접 물류창고로 차를 몰고 왔더랬다. ‘담당님 말씀 다 이해하는데 고객에게 이미 다 약속을 해버렸다, 우리 회사는 매출이 적어서 이런 서비스들이 중요하다, 한 번만 봐주셔라’ 통사정을 해대는데, 그러다 보니 미운 정도 쌓이고 담배 깨나 나누어 피곤 했더랬다. 


퍽 좋은 기억이다. 현장엔 오더피커라는 장비가 있는데, 사람이 땅에 있고 지겟발만 위아래로 움직이는 지게차와 달리, 오더피커는 사람과 지겟발이 함께 위아래로 오르내린다. 현장 소장이 운전하는 오더피커에 동승해, 대략 아파트 3층 높이인 고단 파레트렉에 올라 한 발은 오더피커에, 나머지 한 발은 파레트 렉에 걸친 채 아슬아슬한 공중으로부터 케이크를 꺼내어주곤 했다(당연히 안전을 위해 X반도를 체결해야 한다, 안전제일). 대표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성가시게 구는 게 미안했던지, 사무직인 나와 현장 소장님을 위해 자기네 케익을 자주 선물로 주곤 했다. 우리 냉동창고 안에 보관하고 있던 그의 케익, 영하 21도에서 싱싱하게 보관하고 있던 초코케이크 한 팩을 성큼 꺼내어주었다, 여름이었고, 꽝꽝 언 케이크를 지글지글 아스팔트 위에 놓아둔 채 우리 셋은 자주 담배를 피웠다. 아직까진 퍽 좋은 기억이었다. 

 

코로나와 함께 배달앱 전성시대가 열렸고, 카페 사장님들의 지갑 사정까진 몰라도 거기 케익을 납품하던 업체들은 연신 싱글벙글했다. 한 달이 멀다하고 매출이 오르는 게 보였고, D 업체도 어느덧 월 매출 1억을 달성하게 된다. 하나둘씩 직원을 구하였고, 그 어리숙했던 대표와는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다. 그로부터 2년이 채 안 됐나, D 업체의 영업을 담당하는 우리 회사 직원이 같은 또래끼리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권한다, 겨울이었다, 술자리가 있는 강남으로부터 오산은 꽤 멀었고 도착하니 1차가 끝나 있었다. 우리 회사 영업 담당 하나와 일찍이 언급한 젊은 대표, 그리고 미처 언급하지 않은 D사의 공동 대표, 또래인 그들 셋은 이미 취해 있었다. 


연극 후기인데 뜬금없이 이 일화를 꺼낸 이유는 바로 다음 대목 때문이다. 언젠가 다른 에세이에도 이 소재를 써먹은 것 같은데, 우린 2차로 위스키 바에 갔고 그곳은 D사 대표의 오피스텔 1층에 위치했다. 손님은 없었고, 아마 알바생일 훤칠한 여인 넷이 우리 테이블 곁에 붙어 있었다. 바로 옆자리를 차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정녕 그랬더라면 빤스런을 쳤을 테니까. 종업원이 위치한 바텐더 홀을 따라 4인석 테이블이 반원형으로 접붙어 있는 구조였는데, 원래라면 1명씩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손님 응대를 하기 용이한 구조로 보였으나 손님이 없었을 따름에, 죄다 여기로 모여 옹기종기 붙어 있는 형국이었음이다. 


메뉴판에서 제일 싼 위스키는 그 이름의 친숙함과 달리 낯선 가격 40만 원이었고 조금의 배신감과 커다란 당혹감을 느끼던 중, 그는 대뜸 60만 원짜리 위스키를 주문했다, 가장 싼 것으로 후리자니 가오라도 상할 값인 양. 그리고 그 위스키를 8명, 그러니까 우리 넷에 종업원 넷까지 합세해서 8명이서 공평하게 나누어 마셨다. 종업원들은 친절했다, 어떤 말을 해도 완벽하게 매끄러운 웃음으로 돌려주었고, 그 친절이 너무나도 매끄러워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 그런 걸 진심으로 간주하기엔 내 불신이 깊어서, 한 자 물길 속처럼 너무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 어쩌면 선의의, 어쩌면 대가성의, 당연한 거짓, 굳이 반문조차 필요 없는. 반면 일행들은 행복해했다, 황홀해했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까. 곁에선 훤칠한 여인들이 완벽하게 매끄러운 웃음을 돌려주고 있었고, 아마 60만 원은 저 미소의 값어치, 그걸로도 조금은 부족해서 저 여인들은 60만 원짜리 위스키 중 기어코 30만 원어치는 마셔야만 했을 것이다. 어색함을 가누지 못한 나는 위스키만 연짝으로 퍼마시다간 도망쳤고, 버스 안에서 기어이 필름이 끊겼다. 그 위스키 바는 대표가 사는 오피스텔 1층, 1병에 60만 원짜리 값비싼 위스키를 파는 곳이었다. 어리숙해서 편안했고 그래서 눈길이 가던 그 사내, 몸소 냉동창고를 누비던 젊은 대표,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담배 깨나 나눠피던 그는 어느샌가 고루하고 빤하며, 그저 그런 사내 1로 변모해 있었다. 그리곤 시간이 더 지나 그가 살던 오피스텔엔 근저당이 잡혔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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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로테/운수’는 옴니버스 구성의 연극이다. 극은 2개의 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사이 아무런 연속성이 없으니 이건 단막극이라 해도 좋겠다. 제목이 가리키는 바는 퍽 직접적인 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로테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가리킨다. 본 극 ‘로테/운수’는 각각의 원작 속에선 조망되지 않은 여인의 관점에서 극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려는 듯하다, ‘원작이 독자에 이르러 낭만적으로 여겨질 수 있었던 까닭은 남성 주인공 위주의 관점에 가려진바, 그 실상은 전혀 다를 수 있다’라고. 그 주장에 동의한다. 


새하얀 공간에 도드라지는 색감의 새빨간 정장을 입은 여인이 등장한다. 큰 키에 빨간 정장, 머리는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고 쇠테 안경을 쓴 그녀, 로테는 지적이고 유능하며 한껏 매력적인 아우라, 카리스마를 발산한다. 어딘가 잔뜩 예민하고 만사 피곤한 양 그녀 자리에 앉아 있고, 곧 그 뒤의 배경으로부터 글씨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때 무대로는 타이핑 소리만이 타닥-타닥 울려 퍼졌다. 그녀의 존재감만으로도 이 4평 남짓한 공간이 충분히 채워 넘쳤기에, 나긋하게 울리는 타건 소리만을 남겨둔 채 나머지 것들을 비워둔 연출은 흡족하다. 


로테는 심리 상담을 받으러 왔다. 젊은 나이에 미술 전공 부교수 자리를 꿰찬 그녀는 자타공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으나, 그렇다고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닌 듯하다. 학과 회식에서 학과장 및 동료 교수와 1차가 끝나고 나면,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2차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려는 모습에 로테는 발끈하지만, 학과장은 다음 사진 속의 대사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나는 저것이 과장된 이야기는커녕, 그저 발에 채이는 돌멩이처럼 범상한 일임을 알고 있다, 왜 그런지까지도. 일찍이의 서문을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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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것은 아직 일상의 사건일 뿐이고, 여전히 불합리의 영역이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불합리가 아니라 부조리이고 그녀에게 있어 부조리, 그러니까 상담사를 찾게 한 것은 다른 사건 탓이다. 자신의 오피스텔 앞에 언젠가부터 장미꽃이 놓여 있었고, 남자 친구의 기특한 장난인 줄로만 알았던 그것은 스토킹의 전조였다. 그러나 남자 친구에게 말해본들 “로테- 아직 죽지 않았네”하는 흰말이나 일삼고 앉았고, 어머니께 말씀드리자니 “그러게 여자 혼자 나가 살지 말라 그러지 않았느냐”는 둥, 아빠 구두랑 군복을 가져다 두라는 둥 말해오시니 그녀로서 화가 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 어머님의 입장이 십분 이해가 가지만, 그것은 불변하는 현실을 체념하고 그저 가슴속에 욱여넣듯이 받아들인 까닭, 어머님은 자신도 모르게 딸에게 체념을 종용하고 있던 것이다. ‘세상은 위험하고, 여자 혼자 살아가는 것은 녹록지 않으며, 그러니 미우나 고우나 집에는 사내놈이 하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너 김 서방이랑은 언제 결혼할 거냐, 아니 왜 화를 내고 그래 엄마한테, 연놈이 그만큼이나 오래 붙어 있었으면 좋던 싫던 결혼 생각을 해야지.’


경찰서에 가본들 그들로서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인기 좋으시네요’라는 말로 속이나 까뒤집어대니, 들이밀 물증이 없고서야 이 이상은 역정을 내본들 변할 것은 없고 나만 미친년 되기 십상. 그녀는 초소형 카메라를 집에 설치해 스스로 물증을 잡고자 한다. 카메라에 찍힌 영상에 한동안 이상한 점이 없어서 안심한다. 그리고 어느 날, 집 안에 커다란 장미꽃 다발이 놓여 있다. 영상 속에서 찾아낸 범인은 그녀의 대학 제자, 그 이름은 “베르테르”이다. 


해석에 있어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나로서는 너무 냉정하다는 소리를 듣기 다반사였으니,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작품을 향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에 대한 세간의 찬사와 성화를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소심한 사내의 순정은 다 좋다만 과하고, 한 여인에 대한 커다란 사랑과 상사의 아픔도 좋다만 그 또한 과하고, 마침내는 ‘널 위해 죽겠어’라는 상투적인 말을 남긴 채 겨우 권총 자살이나 시킨 저 의뭉스러운 서사가, 대저 무슨 깊이와 소기 의미나마 가질 수 있는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본 극은, 베르테르의 일방적 순정을 바라보는 로테의 입장에서 서사를 재해석한다. 


베르테르는 스토킹 범죄로 구치소에 수감됐고, 로테는 그 어머니의 사정에도 합의하지 않겠노라 제 뜻을 관철한다. 이내 베르테르는 투신자살하게 된다. 뉴스의 메인 섹션에는 “젊은 여교수를 향한 학생의 순정”과 같은 반-미학적인, 정확히는 저급한 구타 유발용 캐치프레이즈로 연일 도배된다. 진정, 저급 기사의 작명 목표는 구타 유발일 것임이 자명하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건 불합리가 아니라 이러한 부조리이고, 남자 친구가 머리에 총 맞은 언행을 일삼을 때마다, 장미꽃이 놓일 때마다, 어머니가 답답한 소리를 하실 때에도, 경찰이 추잡한 웃음을 흘릴 때에도, 흰 바닥으로 된 무대 바닥이 한 줄씩 검게 칠해진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무대 구석에서 조용히 롤러에다 물감을 적시던 스태프는 불합리 하나에 검은 줄 하나씩을 그어가며, 로테의 행동반경을 좁혀간다. 


언제나 타인의 서사에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로서는 가십의 중심에 선 로테를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눈길과 목소리를 수군대고, 그녀의 신경증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바닥에는 한 줄씩 검은 줄이 그어지고, 설 자리가 좁혀들다간 갑자기 암전, 온통 희었던 벽에 어지러운 영상이 투사되고, 스태프는 미친 듯이 바닥을 칠해댄다.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쓴 편지를 모은 유고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 “선생님은 그 사람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날 자격이 있어요. 당신도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오- 세상에, 이런 정신 나간 망상장애 환자를 봤나. 죽어서까지 씨나락을 까 잡수시네. 어쩌면 이건, 아들에의 선처를 처참히 짓밟은 어머니의 복수일지도 모르겠다. 로테, 비명을 지른다. 1막 끝.

 

 

그때도 김 첨지가 오래간만에 돈을 얻어서 좁쌀 한 되와 십 전짜리 나무 한 단을 사다 주었더니 김 첨지의 말에 의지하면 그 오라질 년이 천방지축(天方地軸)으로 남비에 대고 끓였다. 마음은 급하고 불길은 닿지 않아 채 익지도 않은 것을 그 오라질 년이 숟가락은 고만두고 손으로 움켜서 두 뺨에 주먹덩이 같은 혹이 불거지도록 누가 빼앗을 듯이 처박질 하더니만 그날 저녁부터 가슴이 땅긴다, 배가 켕긴다고 눈을 홉뜨고 지랄병을 하였다. 그때 김 첨지는 열화와 같이 성을 내며, 

 

“에이, 오라질 년, 조롱복은 할 수가 없어, 못 먹어 병, 먹어서 병, 어쩌란 말이야! 왜 눈을 바루 뜨지 못해!”하고 김 첨지는 앓는 이의 뺨을 한 번 후려갈겼다. 홉뜬 눈은 조금 바루어졌건만 이슬이 맺히었다. 김 첨지의 눈시울도 뜨끈뜨끈하였다.


이 환자가 그러고도 먹는 데는 물리지 않았다. 사흘 전부터 설렁탕 국물이 마시고 싶다고 남편을 졸랐다.

 

“이런 오라질 년! 조밥도 못 먹는 년이 설렁탕은, 또 처먹고 지랄병을 하게.”라고, 야단을 쳐보았건만,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

 

- 현진건, 운수 좋은 날 (1924)

 

 

암전이 내리고 막이 전환된다. 2막은 운수 좋은 날의 재해석인데, 여기서부턴 내용을 좀 요약할까 한다. 내용이 폭력적이라서 다루기 까다롭거니와, 이랬다간 연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설명해야 끝날까 싶어서. 2막 내용은 이상의 인용으로도 충분히 그 내용을 짐작하실 수 있겠는데, 보시다시피 소설은 남편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기에, 저 안에 낱낱이 기술된 폭력조차 일말의 사랑으로 간주되기 십상이었다는 점을 연극은 드러내려 한다.


왜 그때 ‘두 뺨 주먹덩이처럼 불거지도록’ 밥을 쑤셔 넣었던지, 얼마나 아팠던지, 그런 중에 설렁탕은 왜 먹고 싶었던지, 뺨 싸대기를 후려맞은 만큼 쉽사리 입이 떼어지지도 않았을 터, 함부로 입을 떼었다 어떤 불호령이 날아들까 조심스런 마음으로 가만대는 것이 응당할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 기어이 설렁탕을 부르게 한 마음이란 무엇이었던지, 보시다시피 소설에 그런 것들이 비어 있다. 소설의 지배적인 관점은 저 마지막 문장, “못 사주는 마음이 시원치는 않았다”로 귀결되곤 쉽사리 지나쳐 버렸다는 말씀이다.


2막은 가정폭력을 일삼던 남편의 대가리를 설렁탕 뚝배기로 까부순 아내 ‘운수’가, 살인의 죄목으로 법정에 선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가정폭력의 면면을 잘 그려냈고, 그때 가정폭력 피해자인 여성이 충분키는커녕 최소한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장면들도 여실히 그려진다. 한편 이렇게 딱딱한 말만 늘여놓자니 당치도 않은 평가질로 비칠까 저어된다만, 굳이 그것을 펼치어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추후 들지 않는다. 다만 연극이 끝나고,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또한 오래된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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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극은 원작을 재해석함으로써 기존 서사에 부재한 현실성과 핍진성을 보증한다. 저게 사랑과 낭만이라니, 우습잖아. 핍진성에 천착하는 나로서는 이 시도가 적이 좋았으나, 한편 ‘베르테르’ 재해석에 비하여 ‘운수 좋은 날’은 다소 아쉬운 점도 눈에 띈다. 시대 배경을 현대로 옮기는 가운데, 또 서사의 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원작에 없는 몇 가지 설정들이 추가되었는데, 그것이 도리어 핍진성을 일부 희석했다는 인상을 갖는다. 텍스트 해석에 왕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는 ‘운수’가 원작에 없던 직업을 가졌다는 점, 그리고 원작의 절정부 대미를 장식하는 자식의 존재가 제외되었다는 점은 아쉽다. 그러나 이하에 추가로 나열할 비평은 연극에 대한 애정어린 견해일 뿐, 추호 못마땅함이 아니이다. 2막, 운수는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극의 설득력을 넘치도록 보충했다. 그래서 괴로웠고, 그래서 훌륭했다.


본 극은 70분 남짓한 짧은 극이다. 그 안에 서사적으로 완전히 독립된 단막극 2개가 배치되니, 각각에 할애된 시간은 짧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게도, 물리적 시간이 짧은 만큼 설득을 위한 서사가 축약되는 것 또한 자연한 수순이었다. 각각은 개별 작품으로 다뤄지기 충분하기에 느끼는 아쉬움이 컸다. 로테와 베르테르의 관계 서사는 지나가는 대사, 즉 ‘선생님도 제가 싫지 않았잖아요, 좋아하시는 파란 리본을 제게 주셨잖아요’에 함축된 채 제시됐고, 베르테르와 알베르토, 즉 현 남친 서사도 시간상 생략되었다. 나아가 원작에서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복합적인 감정, 즉 이 극이 다룬 ‘완전한 타자로서의 감정’이 아닌 연민과 끌림의 감정을 느꼈는데, 이 또한 생략될 수밖에 없었다. 할애된 시간이 충분했더라면, 로테와 베르테르의 관계 서사도 다르게 정립할 수 있었을 터이고, 그에 따라 이 연극의 메세지는 더욱 강력한 메시지를 내포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예컨대는 이런 대사, ‘너는 신경이 쓰이는 학생이었어. 넌 분명히 이 전공에 재능과 열의가 있고, 그런 네가 기특하기도 대견하기도 했지. 근데 이건 아니야, 베르테르, 우린 이어질 수도 없고 내겐 이미 사랑하는 남자 친구도 있어.’ ‘선생님도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잖아요. 그 남자는 멍청해요. 당신 같이 지적이고 우아한 사람 곁에 있기에는 너무 아둔해요. 선생님이 아깝다구요. 선생님은 훨씬 더 좋은 남자를 만날 자격이 있어요.’ ‘그게 맞다고 치자, 그렇다 한들 네가 그 좋은 남자는 아니야. 넌 위험해, 위태롭고, 결국 날 괴롭고 미치게 해. 난 널 경멸해.’


‘운수 좋은 날’의 경우엔 남편의 서사가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갑자기 택시기사를 하게 된 남편이 왜 폭력적으로 변했는지, 원작에서 인력거꾼으로서의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았듯, 그가 어떤 스트레스를 받았던지를 그려낸 뒤, 그럼에도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했더라면,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힘으로 다 멈추지 못했을 테고, 사회는 그녀를 보호하지 않고, 세상은 그렇게 변함없이 흘러가며, 이내 부조리에 당면한 그녀가 마치 이방인의 뫼르소처럼 남편의 뚝배기를 까버릴 수밖에 없었더라면 서사가 더 극적이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원작에선 아이가 죽은 어미의 빈 젖을 빠는 소리가 절정을 장식하는데, 본작에선 그를 대신하여 남편의 가정폭력을 보고 자라는 저학년 아이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도 서사의 깊이와 역설을 더 심화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아내 ‘운수’가 극의 결말을 장식한 대사, ‘아무래도 오늘은, 운수가 좋은 것 같아요’가 그것을 해석할 별다른 근거를 마련해 두지 못했다는 점을 마지막으로 비평 마친다.


일찍이 ‘베르테르’ 비평을 일삼을 적에도 주변으로부터 야유와 핀잔을 많이 들었고, 그러므로 이런 변죽이 달갑지 않은 것임을 익히 알고 있다. 누군가가 사랑하는 제재에 대한 비평은, 그 사랑에 대한 대적 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음을 내 것으로도 느끼어 알고 있다. 그러나 일찍이 베르테르가 넘치는 사랑으로 신성시되었듯이, 그리고 그에 대한 갑갑함이 마침내 이런 연극을 탄생케 하였듯이, 서사가 왜곡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비평에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좋은 각본이었고, 차고 넘치는 연기였다. 오늘의 연극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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