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가 보고 싶어서 찾아보던 와중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세계의 주인>을 알게 되었고, 영화의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채로 극장을 찾았다. 독립 영화를 주로 상영하는 영화관에서 봤으며, 그런 영화관은 처음이라 호기심 반 신기함 반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 이름이 ‘이주인’이라는 것에서 이 영화가 그 주인공의 세계-자신만이 가지고 영유할 수 있는-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보를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와서인지 영화의 주 내용이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것이라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다.
처음 든 생각은 어떤 충돌이었다. 여느 학생들과 다르지 않은, 사랑도 하고 친구들과 활발하게 뛰어다니는 평범한 고등학생. 그런데 성폭행 피해자를 위한 가해자 출소 반대 서명을 받는 수호와 부딪히는 지점에서 미간이 찌푸려졌다. 10세 여아를 성폭행한 40대 가해자. 이 문장 하나만으로 생각할 수 있는 끔찍한 시나리오는 여러가지였다.
고정관념은 억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마치 규칙처럼 여겨지던 것들이 서서히 나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나도 주인을 이상하게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끔찍한 가해자가 출소를 한다는데,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다가 피해자가 느꼈고 느끼고 있을 고통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저렇게 똑똑하고 영리한 애가 왜 그런 사고를 가지고 있을까, 라는 생각에 몹시 불편했던 것 같다.
본인이 피해자라고 처음 말한 후, 주인은 장난이라며 웃고 만다. 선생님이 벌점을 준다고 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달려가 한 번만 봐 달라고 한다. 사실 주인은 ‘척’하는 것이 아니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과거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은 척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마저 주인의 과거와 현재를 짐작하는 타인의 사고방식일 뿐. 주인은 단지 불행을 묻어두고 미래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주인이 피해자라는 것이 알려진 이후, 주인에게는 주인을 비난하는 질문형의 쪽지가 몇 개 도착한다. 진짜 이주인은 누구인지와 같은 주인의 행동에 대해 마치 따지는 듯한 쪽지 말이다. 그 외의 반 친구들도 주인에 대해 무성한 소문과 추측을 낳는다. 그들이 주인을 정말 싫어하든 아니든 하나의 가십거리처럼.
진짜 이주인은 어떤 모습일까? 과연 제 3자가 그것을 파악할 수 있을까? 어쩌면 주인 자신도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주인의 세계에서 주인은 본인을 위해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사람이니까. 보통 사람들이 나는 ‘이래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가며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주인 또한 그럴 뿐이다. 타인에게 보여지는 ‘진짜’ 주인이라는 가설은 어쩌면 ‘성폭행 피해자인데 왜 멀쩡하지?’ 라는 고정관념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쪽지를 보낸 사람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쪽지를 보낸 이가 주인과 비슷한 과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알려진다. 단지 진실이 궁금했던 것뿐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작성자는 주인에게 “너는 나와 다르다”고 말한다. 당연히 주인이 자신에 대해 말했다고 해서 다른 피해자들을 일반화할 수 없다. 주인과 마치 양극에 서 있는 듯한 작성자를 등장시켰다는 것에서 나는 쪽지가 등장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쪽지가 등장한 것, 처음에는 주인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다가(나 또한 주인을 미워해 주인을 괴롭히기 위한 쪽지라고 생각했다) 후에는 어쩐 다짐과 고마움을 표하게 된 것, 끝까지 보낸 이가 등장하지 않고 반 아이들의 목소리로 나레이션 된 것 또한 고정관념에 조금씩 충돌을 준 것이 아닐까. 고정관념이 억지로 만들어 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고정관념을 없앨 수 있는 것 또한 커다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각의 변환, 충돌 같은 것들이 아주 조금씩 고정관념을 변화시킬 것이다. 쪽지를 보낸 이가 피해자임에도 스스로에게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주인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바꿔보겠다고 다짐한 것처럼 말이다.
영화를 보면서 한 가지 더 생각한 것. 이 영화에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람으로 정의될 수 없는 것들(이를테면 가해자들)은 출연하지 않는다. 물론 영화 내에서 주인에게 상처를 줬던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맞다. 엄마와 아빠는 주인이 성폭행을 오랫동안 당하고 있는 것을 몰랐고, 수호는 자신도 모르던 고정관념 때문에 주인에게 상처를 줬으며, 주인의 친구들은 의도치 않게(혹시 모르지만 이렇게 표현하겠다) 주인을 배제시켰다.
하지만 그들 또한 본인이 가진 세계의 주인이다. 그리고 그 세계들은 주인의 세계와 겹쳐진다. 행복의 지점에도 불행의 지점에도 손을 포갠 것처럼 겹쳐진다.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입체적이다. 사람은 입체적이라는 말에 가장 적합한 예시를 들어줄 수 있을 만큼.
엄마는 주인에게 일어나던 일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현재에선 주인을 본인보다 사랑한다. 세차장에 가 주인의 울음을 혼자 겪으면서도 본인의 배가 아프다는 것은 무시한다. 술을 매일 마시다가도 어느 날에는 스스로를 바꾸기 위해 싱크대에 술을 버린다. 주인의 아빠에게 가 화를 내며 주인을 걱정시키지 말라고도 한다. 그렇다고 주인의 아빠가 나쁜 인물이라고 한다면,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 아빠는 회피성으로 도망간 것일 수도 있다. 주인의 엄마가 이곳에 있는 게 편하냐고 물은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결국 주인에게 문자를 보내고 다음을 기약했다는 점에서 본인의 죄책감에서 오던 외면을 깼다는 것처럼 보였다.
누리의 역할에 대해 고민한다. 수호가 한창 가해자 출소 반대 서명을 하고 다니다 은근한 거짓말(수호의 입장에서)로 작성된 서명문을 주인에게 내밀었을 때 주인은 이런 말을 한다. 네 동생 누리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떨 것 같은지 상상해 보라고. 이후 누리의 몸에서는 작은 멍들이 발견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누리를 괴롭게 하는(아프다고 말하지 못했지만) 대상이 누구인지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하지만 주인은 누리의 상태를 보고 누리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짐작한 듯했다. 이렇게 꼬집어도 아픈지, 이렇게도 안 아픈지 계속해서 물었고 그것은 주인의 엄마에게로 전해진다. 주인이 했던 행동과 말을 주인의 엄마에게 누리가 해준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계가 겹쳐진 이들의 가해와 피해는 아주 옅어져 있었다. 당사자의 불행은 그들만 알고, 그것을 지레짐작하거나 고정관념으로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아프다고 말해도 된다는 힘을 심어주는 관계이다.
주인-미도의 관계에서 또한 이러한 감정을 받았다. 스스로를 용서하는 것이 너무 어렵지만 살아있기에 계속해야 한다는 미도와 자신의 밝음을 손에 쥐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주인. 주인의 남자친구를 피해자들과 함께 봉사하는 곳에 데리고 왔다는 이유로 그들은 부딪혔지만, 또다시 아무렇지 않게 그들이 가진 세계의 교집합 속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다른 관계와 다를 것 없이, 서로를 미워하기도 했다가 다시 이해하고 이어진다. 사람은 타인과 끊임없이 연결되기 때문에 입체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미운 행동을 했지만 그 누군가를 너무나도 사랑할 수 있고, 너무나도 서로를 잘 이해하고 있지만 때때로 어긋남이 생겨날 수도 있다.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아픔을 옅게 만드는 것의 시작이 된다.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실패한 인생이 아니고, 그것을 말한다고 해서 나의 세계와 겹쳐져 있던 무수한 세계들이 단숨에 잘려나가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나는 주인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얄팍한 고정관념에 충돌을 줬던 이 영화를 어느새 잊지는 않을까? 사실 나의 고정관념으로 인해 내가 하는 말과 쓰는 글이 실례가 될까 조금은 두렵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쓰는 이유는 변화를 향한 주인의 다짐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이다. 아마 나 또한 쪽지 속 작성자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어느 한 구석에는 변화가 무서워 스스로 도망치고 있는 모순적이면서도 입체적이고 평범한 사람.
오랜만에 이렇게 좋은 영화를 만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며 수많은 이름들이 나올 때 알았다. 고정관념과 엇나간 시선은 이 이름들이 조금씩 바꾸고 있었던 거구나. 그리고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관객 중 아무도 나가지 않는 것을 보면서도 실제로 이어져 있지 않은 사람들이어도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세계가 아주 조금씩은 겹쳐져 있다는 걸 느꼈다.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나를 용서하지 못해서 남들과 다르다고 느껴질 때 주인과 미도가 떠올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