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얘기 안 했어
장례도 없이
환생도 없이
같은 몸에서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다는 걸
여러 개의 문을 열어도
아무도 말 안 했어
깜깜한 방에서 웅크리면
나는 절반밖에 없다는 걸
어둠이 나를 파먹고 있다는 걸
한번, 찢어 본 적 없는데
팔다리도 흔들지 않는데
저 안의 옥수수는
정말 살아 있나?
외투 속 나는
정말 살아 있나?
- 「옥수수 귀신」 (전문)
「옥수수 귀신」을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집의 전 시를 읽어보는 편이 좋다. 한 줄 한 줄이 시집의 규칙을 앞서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첫 시집 『양파 공동체』의 해설을 쓴 권혁웅은 손미 시에서의 ‘나’를 “안을 열고 들어가도 나는 여전히 바깥”이며, “나는 안팎의 경계를 끊임없이 지우는 경계의 존재”라고 칭했다. 권혁웅의 시론에 따르면, 『양파 공동체』속 나는 거울상, 즉 도플갱어인 나를 만나기 위해선 죽어 ‘귀신’이 되고, 살을 얻어 ‘시체’가 됨으로써 끝내 ‘너’를 만난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에선 조금은 다른 시 세계의 변형이 돋보인다. 여전히 시인은 외부를 가진 것들에 골몰한다. ‘외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내부를 가지고 있다’와 공통어이다. 시집 내에서 ‘외부’란 껍질, 헝겊, 연기, 방, 가죽, 살 등등으로 변주되며 반복되고 재현된다.
이 시의 옥수수 역시 그러하다. 옥수수는 알알이 들어찬 알갱이들이 모여 있는 형태로, 겉으론 겹겹의 껍질에 싸여 있는 형질을 가지고 있다. 이 옥수수는 「양파 공동체」 속 「양파」와 유사한 구조이다. 겹겹의 껍질을 가지고 있으며, 흰 “방들이 꽉꽉 차 있”다.
그러나 「양파 공동체」 속 양파가 아무리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이 불가한 것과 달리, 「옥수수 귀신」 속 옥수수는 “웅크리고 앉”을 수 있는 알알의 연속적인 방이다. 그러나 그 방 안으로 침투하려 문을 열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육체에 공존할 수 있는 여러 번의 죽음, 그리고 겹겹이 감싸고 있는 외피이자 살. 이것을 뒤집어쓰고 있는 옥수수 ‘귀신’.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에 등장하는 시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이라 볼 수 있다. 즉,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을 외피로 두르고 살아간다.
“장례도 없이 / 환생도 없이 / 같은 몸에서 / 몇 번이나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무도 얘기하”지 않았다는 말은 ‘몰랐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2014년~2019년 쓰인 것으로, 우주 차원에서의 너를 갈망하는 『양파 공동체』와 달리 이 땅 위에서의 안과 밖, 너와 나, 죽음과 삶에 골몰하고 있다. “길 잃은 여객선”(「속」), “유령선”(「물의 이름」) 등의 키워드와 반복되는 죽음의 변형태 동사들을 살펴보았을 때, 앞서 설명한 손미의 시적 세계의 변화에는 2014년 있었던 세월호 참사의 영향력이 커 보인다.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전문.
손미 시에서 ‘방’은 침투 불가능한 공간은 아니다. 「목요일의 대관람차」에서 칸칸이 이어진 시의 방을 이동하고,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에서나 「문」, 「전구」에서처럼 때때로 열 수 있는 문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열었을 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부재로 알게 되는 죽음뿐이다.
결국 “깜깜한 방에서 웅크리면”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절반밖에 없다는” 것, “어둠이 나를 파먹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 안에 들어 있는 나는 절반밖에 없으며, 무엇이 나를 파먹고 있고, 왜 아무도 말하지 않았을까?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짓밟고 살아가는 공동체, 그것이 우리이기 때문이다. 육식하며, 가죽 외투를 입고,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하고 케이크에 불을 켜고 살아가고 있다. 죽음과 함께하고 있는 것이다.
손미의 시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육체를 가졌을 뿐, 죽음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반복되는 죽음을 외면한 채 살아가는 공동체 속에서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손미는 ‘찢음’, ‘침투’, ‘관통’ 같은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이 세계에서 진실한 사랑과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반드시 그 고통을 통과해야 함을 말한다.
결국 시집의 마지막에서 “어쩌면 문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거다”라는 고백은 언뜻 허무하지만, 그 허무에 도달하려면 우리는 스스로를 찢어보고, 관통하고, 통과하고, 침투하는 노력을 거쳐야 한다. 그렇게 이 시 세계는 침묵의 외피를 찢고 난 뒤에야 비로소 웃으며 도달하는 것이다. 거기에 옥수수가 살아 있다고.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이어져 있다 믿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