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마주치는 사람도, 평생을 가져가야만 할 것 같았던 범주 내에 있던 사람도 종착역에 다다르면 당연하듯 내려야 할 것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한평생 변화무쌍하다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은 어떤 다른 것도 아닌 내가 지니고 있는 나의 진심인 듯하다.
시끄러운 폭우가 쏟아지더라도 이는 영원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가 오고 나서 저절로 아름답게 갠 푸른 하늘과 무지개를 마주할 수 있듯 자연의 법칙이라 칭할 수 있는 날씨 또한 영원하지 않은데 우리의 마음 또한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마음은 변화하지만 진심은 남는다. 마음에 웅덩이처럼 고여있는 감정이란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에 위안받고, 슬퍼도 하염없이 무너져도 발을 딛고 걸어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진심에 생기를 더하고 보존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아정체성을 확립하는 의지와 직결한다고 본다.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날씨를 바꾸는 건 인간이 개입할 수 없다. 철저한 자연의 영역이며 모든 자연을 개척하고, 해를 가함에도 발전시키고 공생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자연이라는 무대에서 엄격히 배제된다. 인간은 자연이라는 공활하기 끝없는 신성함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진다.
정답에 대한 이야기
정답이 아닐지도 모르는 것을 정답이라 배우고 그렇게 믿도록 강요하고, 강요받는다. 해당 궤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나친 오답이라 느낀다. 굉장히 무서운 일이다. 개성은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모두가 획일화라는 거대한 파도에 몸을 실은 채 떠밀려간다. 의심스러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더글러그 애덤스의 소설을 들여다보면...
“아득한 옛날 우주에서 두 번째로 똑똑한 컴퓨터인 ’깊은 생각‘에게 사람들은 쌀,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컴퓨터는 750만년 동안 연산한 뒤 답을 주면서 답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답은 ‘42' 해답은 얻었지만 도무지 왜 '42'가 해답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컴퓨터는 말한다. 제대로 된 질문을 던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제대로 된 질문을 찾기 위해 새로운 컴퓨터를 만들 것을 제안하는데, 그 컴퓨터가 바로 '지구'이다. "저는 제 다음에 올 바로 그 컴퓨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 저 같은 것은 그것의 일개 작동 변수조차 계산할 수 없는 그 컴퓨터 말입니다.“ 깊은 생각은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견하는 세례 요한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단호하게 말하자면 보편적인 정답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답이라는 기준을 끊임없이 들이미는 사회, 그리고 그 압박 속에서 정답을 산출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는 우리. 남들의 답안만을 좇아 달려간 끝에는 깊은 권태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적혀있는 정답을 베껴 쓰려 애쓰지 않고, 공을 들여 과거를 돌아보고 나만의 해답을 찾는다. 살아온 계절이 다르고, 저마다 마음속 새겨진 글씨가 다르니 출력되는 글도, 전체적인 문양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42’라는 숫자는 모두가 그토록 원하던 진심으로 풀어내는 정답일지도 모른다. 질문을 자신의 삶에서 절실하게 피워내자. 해답을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차별과 고통
인간의 지혜는 인간의 어리석음도 함께 가져가는 까닭에
문화, 역사, 말 자체가 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것이다. 이게 싸움이 되나?
우리가 니체냐?
모든 가치의 전도 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냐?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이다.
세상을 살면서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매번 낭만이라는 정서를 모두가 높이 사고 이를 최적의 가치로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이 분열로 이루어지는 싸움,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어려움, 혐오로 도사리는 범죄들.
많은 어둠이 찬란함으로 물들여진 낭만을 위협하고 있다. 이는 지금 현세대만이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부터 인간이 땅에 발을 딛고 생활하고 있기에 아마 평생토록 우리는 이러한 현실의 고통과 이상적 공간의 괴리에 괴로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정말 그냥, 평범하게 일상을 살다 보면 수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사람은 대체 왜 그럴까.’, 극악무도한 사건을 접하게 될 때마다 세상살이에 한탄하고 우리는 대체 어떤 존재에 귀의해야만 하는지 평안이라는 두 글자를 입으로 머금고 내뱉는 것이 그렇게나 버겁게 느껴진다.
본래 타인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번복되는 기대와 실망이라는 늪에서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사람만이 승리자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관념을 숙지하고 어깨를 눌러오는 기대를 떨쳐내려 애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심하게 어긋나 있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면 순식간에 느껴지는 당혹감을 지우기 힘들다.
대다수는 포기할 것이다. 뿌리 깊게 박혀있는 관념을 통제하는 인간의 사고란 쉽게 변화할 수 없다는 점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긍정적인 변화라는 것은 허울 좋은 단어일 뿐, 아무도 이상을 좇으려 현실을 타파하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맞서 싸워야 한다, 공들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니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나 자신일 수는 있다. 억눌러온 고통이라는 감정을 해방하고 부딪혀야만 하는 상황에 다다른 것이다.
바보
전 세계는 천재에 열광한다. ‘드디어 나의 세상에, 내가 소속되어 있는 곳에 천재가 태어났다.’ 굉장히 자랑스러운, 이루 말할 수 없는 어여쁜 칭송이다. 천재라는 단어는 듣고 입에 올리기만 해도 영광스럽다. 남들과는 다른 점에서 오는, 그것도 굉장히 뛰어난 차별점이 글자와 어감을 더 반짝이게 한다.
많은 부모는 아이의 천재성을 높이 산다. 부모의 기대를 안고 태어난 아이는 어렸을 적부터 많은 낯선 테스트 앞에 서며 자신의 역량을 재단하고, 천재 혹은 영재라는 무대에서 스스로를 뽐낼 기회를 누리게 된다. 아이의 지능이 또래 아이와 월등히 높을 경우 부모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핀다.
천재라는 매력은 이런 점에서 오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의 기대, 월등한 차이라는 특별함. 어떤 한 분야 내에서 타고나게 그것도 생득적으로 1등이 될 수 있다는 유일무이한 장점. 당연히 나 자신도 몇 년 전까지, 매체에서 접할 수 있는 천재에 대한 막연한 부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천재와는 다르게 ‘바보’라는 단어의 위력과 글자, 어감에 대해서 충분히 고려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고 느낀다. 많은 사람이 바보라는 단어를 그저 상대를 놀릴 때, 비방할 용도로 사용하곤 한다. 바보는 그저 바보. 천재와 달리 고유하거나 특별할 것도 없으며 놀림당하면 그만인 단어.
과거에는 ’바보‘라고 놀림을 당했을 경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는 사람을 굉장히 많이 접했던 것 같은데, 최근에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연인 관계나 소중한 사람과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애교스럽게 ’바보‘라는 단어를 쓰기도 하고, 이전 세대보다 단어의 의미가 조금은 달콤하게 누그러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바보의 ‘순수성’에 대해 고려해 본 적 있는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치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여기에서 나온다.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에 무관심이라는 한결같음을 유지하는 것. 바보의 총체적 관념을 묵인하는 사람은 결코 파악할 수 없는 점.
“바보의 순수성은 사람들이 쫓는 가치를 뒤쫓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무심히 건너뛰어 버린다. 사람들이 매달리는 기존 가치에 반응하지 않는 바보의 등장 자체가 세상을 지배해온 그 가치들을 의문에 부치고 초라하게 만든다. 이런 바보의 방식으로 기존의 세상을 허무하게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발판을 마련한 이들이 있다. 석가가 그렇고, 그리스도가 그렇다.“
‘유로지비는 동방정교에서 바보 행세를 하며 수행하는 수도자를 일컫는 말이다. 공작은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조금 전까지도 당신을 백치로 여겼어요! 하지만 당신은 남들이 전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어요."’
모든 이가 옳다고 떠받드는 사회적 관념을 묵인한다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 지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는 방황하는 청소년기와 사회 초년기를 금세 졸업한 성인이라면 이에 대해 완전히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결점으로 드러나 사회적 명예의 치명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공동체를 중요시하는 동양 사회에서는 이러한 점이 더욱 부각되는 것 같다.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 바보의 순수성은 천재보다 위대한 속성인 것 같아 암묵적으로 그들이 지닌 창의성을 포괄하는 용기를 높이 사고, 체득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새로운 탄생, 그렇게 자연적으로 경외감을 느끼게 하는 세상의 축이 만들어지는 것일까.
유머의 위대함
궁금한 점이 있었다. 정말 힘든 상황에 놓여도 억지로 웃으려고 애쓴다면 심리적 어려움을 떨쳐내고 용기를 얻는 데 도움이 될까.
정답은 ‘Yes’, 심리학을 배우면서 알게 된 지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것이 실생활에 큰 영향력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을 만큼 힘겨운 장애물에 부딪혔는데, 미소를 머금는 사람은 좀처럼 보기 힘드니까.
그냥 단순한 것이라 치부하기 쉬운 유머는 생각보다 더욱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어렵고 힘들더라도, 온 세상이 죽을 만큼 미워서 고통받기 일쑤인 사람이라도, 불특정 누군가의 미소에 구원받는다. 아무런 인식 없이 던진 유머가 누군가를 물웅덩이에서 구하고, 따뜻한 햇볕 아래로 옮기게 한다.
프로이트는 유머의 미덕을 고통을 방어하는 힘에서 찾는다. 지나치게 심각한 갈등을 겪는 이들에게 그 갈등이 별것 아닌 듯 유머러스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을 보자.
“그는 다른 사람들을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대하는 것인데, 이럴 때 그는 어린아이에게는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해관계와 고통들을 미소를 지으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 된다.”
어려울 것 같지만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른다. 장애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불현듯 미소를 짓도록 노력하기, 오늘부터라도 조금씩 연습하면 세계를 재창조하는데 나도 아주 조금은 이바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오늘부터 ‘사랑해’
누군가에게 건네는 ‘사랑해’라는 말은 구속력을 지닌다. 구체적으로 현 세계에 구현되어 있는 법이 아님에도 강력한 힘을 지녀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을 가볍다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이곳에서 나온다.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일수록 사랑한다와 같은 마음의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거 당연히 알 텐데 뭐하러 하나 하는 심정에서이다.
일상은 젖은 옷처럼 회색으로 처진 채 생기가 없는데,
그 일상에 한번 얹어보자니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화려해 어색하게 느껴져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말들은 생활 속에서 사용함으로써만 인공호흡으로 숨결을 얻듯 생명을 얻는다.
사랑의 말은 발화되지 않으면, 바람이 없을 때 죽는 바람개비처럼 고개를 숙이고 잠잘 뿐이다.
다양한 범주의 속성을 배우고 내면이 성숙해질수록 말이 가지는 파급력에 대해서 점차 실감하는 것 같다. 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곱씹어보게 되고, 매번 말이라는 존재를 조심스럽게 대접하게 되는 것 같아 성숙해지고 어른스러운 나 자신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왜 그렇게나 낯간지럽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영원한 것은 없는데, 후회하지 않는 삶을 향해 질주하고자 결심하는데 정작 후회라는 동굴 속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양이다.
미래의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과거, 사랑을 표현하는 힘이 부족했던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아직은 인내력과 기개가 미흡한 것 같다. 벌써 불그스름하게 변한 얼굴과, 불안정한 호흡과 이상한 외양을 한 자신이 떠오른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일수록 마음을 전해주어야지, 그래서 나의 귀중한 사람이 오늘 마음의 꽃을 하나 더 피우고 물을 줄 수 있는 여유를 만끽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