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꿈의 추한 이면 [도서/문학]

'시스터 캐리'를 읽고
글 입력 2024.02.0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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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징악이 없는 책, 시스터 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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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책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내용의 적나라함 때문에 외면당한 책, 시스터 캐리가 그러하다. 1900년에 쓰인 이 책은 1912년이 되어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출판사는 책을 사장시키려 아무런 홍보도 하지 않았고, 평론가들은 입을 모아 비난을 쏟아냈다. 작가 시어도어 드라이저는 이 때문에 생활고와 우울증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독자들의 냉랭한 반응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책의 주인공 캐리는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에서 화려한 여배우로 거듭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남자들과 어울리며 종국에는 그 중 한 명을 파멸로 이끌기까지 하는 팜므파탈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업보를 받기는커녕, 끝까지 성공을 거머쥔 채로 결말이 나니 권선징악을 원한 독자들 입장에서는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드라이저의 소설을 읽으며, 그가 조형한 입체적인 인물상이 실제 사람들의 마음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더 예민한 반응을 끌어낸 것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분명 캐리는 처음 도시로 향했을 때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녀였다. 잠시라도 즐기는 일 없이 일만 하며 칙칙한 나날을 보내는 캐리의 언니와 형부의 모습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러나 캐리 역시 빠르게 도시의 환경에 물들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미모를 이용하려 들었고, 사회는 헐값에 노동력을 착취하려 했다.

 

또 캐리는 성공했지만,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꿈을 이루었을지언정 결코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캐리는 안락한 호텔 방에 앉아 있지만, 그녀의 눈빛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처럼 공허하다. 내레이터는 캐리가 갈망하는 것이 채워질 수도, 충분할 수도 없음을 말한다. 시스터 캐리가 내게 남긴 끝맛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 해당 책을 소개한다.

 

 

 

또다른 주인공, 허스트우드


 

여기서 꿈은 개인이 바라는 이상이기도 했지만, 한편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이상이 되기도 했다. 사실 책을 읽으며 내 시선을 끈 것은 주인공 캐리가 아닌 허스트우드라는 등장인물이었다.

 

허스트우드는 책에서 가장 불행한 결말을 맞은 인물이다. 부족함 없이 살며 술집을 운영하던 그는 캐리와 사랑에 빠져 가족을 버리고 그녀와 도피했다. 분명 아내와 아이들을 저버린 것은 크나큰 잘못이지만, 허스트우드의 몰락은 놀랄 정도로 처절하게 그려졌다. 오히려 허스트우드와 도피한 이후 승승장구하며 유명 배우가 된 캐리와 너무나도 비교되는 모습이었다.

 

둘의 도피는 시작부터 어긋나 있었다. 가장 고조되어야 할 시점인데도, 허스트우드는 결혼을 요구하는 캐리에게 확답을 피한다. 심지어 캐리와 도피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자금은 훔쳐온 것이었다. 이런 불안정함 속에서, 이 둘의 관계가 파국으로 끝날 것임을 예상할 수 있었다.


진정으로 허스트우드를 곤경에 몰아넣은 것은 그의 회피적인 성향이었다. 결국 절도를 들킨 허스트우드는 많은 돈을 몰수당한다. 생활고에 빠지게 된 그는 처음에는 밖에 나가 일자리를 알아보려 하지만, 여러 곳에서 거절을 당하며 의기소침해진다. 심지어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박의 유혹에 빠져 얼마 없는 돈까지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체념은 결국 자기합리화로 바뀌고, 캐리가 밖에 나가 단역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안락의자에 앉아 신문을 보며 시간을 때우는 신세가 된다.


이런 허스트우드를 통해,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물론 허스트우드처럼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적은 없었지만, 가끔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때 속으로 핑계를 대던 내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것이다. 변명하기보다는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 배우게 되는 방향으로 갔더라면, 적어도 내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그런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더라면.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문구가 생각나던 순간이었다.

 

캐리는 허스트우드에게 안정된 환경을 요구했고, 허스트우드는 캐리의 젊음과 미모를 요구했다. 끝내 둘 중 어느 쪽도 상대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느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허스트우드가 캐리에게 버림받는 장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결국 캐리는 약간의 돈을 넣은 봉투만을 남기고 그 둘이 살던 집을 떠난다. 이후 허스트우드가 거지꼴이 되어 극장 앞에 나타났을 때도 여전히 약간의 돈만을 쥐어주고는, 의리로라도 그의 상태를 살피거나 안부를 묻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허스트우드의 인생은 한 초라한 호텔 방에서 끝을 맺는다. 진정성 없는 관계를 이어 나가는 사람들의 말로는 이러하구나 하는 충격과, 도시라는 공간의 무서움을 동시에 느꼈다. 

 

물질주의와 개인의 욕망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한 책, 시스터 캐리는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인물들의 이야기다. 항상 꿈은 영혼을 위로하는 개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본 책이 그려낸 ‘꿈’의 형태는 충격적이었다.

 

보통 주인공이 본인의 노력을 통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면 나 역시 그의 행보를 응원하기 일쑤였는데, 캐리의 경우 그런 마음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녀가 도시에 물든 순간, 이미 캐리의 꿈은 완전한 것에서 멀어졌음을 실감한 탓이다. 한편, 꿈의 부정적인 이면을 인정하고 나아갈 때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생각 또한 들었다. 캐리가 했던 사랑만큼이나 이기적인 꿈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은, 결코 멀리 있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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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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