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Opinion] 그런데 어쩌나, 기쁨은 바깥에 있어서 - 2026 서울시향 마르쿠스 슈텐츠와 바딤 글루즈만 [공연]

완전히 알지 못해도, 덜 준비되어 있어도

by 장유진 에디터
2026.05.26 20:20

 


Markus_Stenz,Vadim Gluzman.jpg

 

 

서울시향의 5월 정기공연, 그러니까 브람스와 월턴을 생각하다 보니 기쁨은 자주 내가 익숙한 자리 바깥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 알고 있어서,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서, 자신 있게 걸어간 자리보다 오히려 잘 모르겠고 조금은 겁이 나는 곳에서 더 오래 남는 마음이 자라났다.

 

어쩌면 브람스와 월턴의 음악을 통해 익숙한 세계 밖으로 나아가는 일과 덜 완성된 채로도 계속 살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Brahm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77


 

 

 

협주곡의 성패를 결정짓는 것은 독주 악기를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이올린 연주는 피아노 연주만 못했던 요하네스 브람스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결국 바이올린 협주곡 작곡에 뛰어들었다.

 

비오티, 베토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얻었던 기쁨을 자신의 작품으로도 경험하고 싶다는 열망과, 교향곡을 두 차례 쓰는 동안 붙은 자신감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브람스는 독주 악기와 관현악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작품에서 방향을 모색하는 한편, 악기 이해도가 부족한 문제는 주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기로 했다. 마침 그의 곁에는 세기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친구였던 요제프 요아힘이 있었다.

 

글 윤무진

(월간 SPO 편집위원· 음악 칼럼니스트)


 

그러니까 이 협주곡은 단순히 바이올린을 위한 작품이라기보다, 자신이 완전히 알지 못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 보려는 한 작곡가의 움직임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 앞에 선다.


나는 큰 세계 안에서 작아지지 않는 법을 알고 있는가?


브람스의 바이올린은 거대한 오케스트라 앞에서 혼자 빛나려고만 하지 않았다. 그 안에 들어가고, 부딪히고, 때로는 기다리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는다. 회사, 관계, 예술, 글쓰기, 공연장. 어떤 큰 구조 안에 들어갔을 때 나는 사라지는가, 아니면 내 소리를 남기는가.


나로서는 상상치 못한 브람스의 순수한 열망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브람스가 피아노에 비해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지 못했다는 것, 잘 모른 채로 바이올린 협주곡을 작곡했다는 것. 어째서 잘 모르는 악기의 협주곡을 썼느냐 묻는다면, 다른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얻었던 기쁨을 자신의 작품으로도 경험하기 위함이었다니. 정말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지레짐작했던 이유보다 훨씬 소박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잘 몰라도 하고 싶다! 그 작은 꿈 하나만 있어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쉽게 잊을 수 있다. 내가 어떤 약점이 있었더라? 무슨 두려움이 있었던가. 그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얼마나 작고 약소한 존재인지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무서운 줄도 모르고 들이닥친다. 감내해야 할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감히 선을 넘는다.


나도 그렇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브람스라는 이름과 이 곡이 가진 무게를 전부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클래식 이야기를 할 거면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 지점에서 큰 물음표 하나가 생겨버린다.


알아야 하는가? 나는 음악을 들으러 왔지, 누가 만들었는지, 이 안에 어떤 맥락이 흐르고 있는지 알기 위해 공연장으로 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음악을 재생할 때도, 까만 어둠 속에 앉아 있기를 택한 것은 이유 없는 끌림 때문이었다. 소리가 탄생하는 자리의 풍경이었다. 노래하는 이의 목소리 없는 독창이었다.


알지 못한 채로 들어도 아무 일이 없지만, 알고 있는 채로 듣는다 해도 꼭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 무슨 일이 있었든 없었든, 이곳을 바라보지 않은 이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나는 알고 있었다. 때로는 목격했다. 모른 척할 수 없는 광경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어깨 위의 나무든, 품속의 나무든. 같은 곡 하나로 이방인의 여러 일면을 간접적으로 접해볼 수 있다. 긴 시간도 필요 없다. 몇 번의 어색한 눈맞춤도 생략된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면, 내가 들여다보기만 하면, 그 안에서 별꽃이 자라난다. 그걸 바라보는 나의 키도 점점 자라났다. 내가 작은 줄도 모르고 자꾸만 커져 갔다.

 

내가 가장 잘 모르는 영역에 들어갈 용기를 낸 적이 있던가?


진짜 도전하기 싫은데. 정말 그리하기 싫은데. 다들 한다. 용기 내기 싫은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넘쳐난다는 게 스스로도 너무 과분하고 넘치게 기쁜데, 자꾸만 외면하고 싶다. 

 

매일 글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남을 칭찬하는 데에만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동네 산책을 나가고, 너무 달지 않은 뻑뻑한 빵을 간식으로 먹으며, 부른 배를 두드릴 수 있는 나날이면 얼마나 좋을까.


다만 뭐든 그리하고 싶다면, 이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앞으로 찾아올 무수한 ‘처음’을 맞닥뜨려야 한다. 두근거리는 마음 한편을 매번 두드리게 된다. 너무 두려워하지 말자. 너무 크게 고민하지 말자. 그냥 하면 안 될까? 아예 마음을 놓아버리면 어떨까? 이게 내 일인지, 네 일인지 구분하지 말고. 그냥 하면 안 될까. 

 

불필요한 염려를 매일매일 내려놓으려 애쓰기보다, 그 염려와 분리되는 시간을 아예 가져버리면 좋을 텐데. 그런 생각만 반복한다.


용기는 어디서 오는 걸까? 현실에서 찾아오는 걸까? 욕심 속에서 피어나는 걸까? 매일이 통제 가능한 예측 범위 안에서 움직이면 어찌나 기쁠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울적함과 적당한 기쁨만이, 익숙한 평화가 이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데 어쩌나. 손에 익은 세계 밖으로 나가야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브람스에게도 이 바이올린 협주곡은 손에 익은 세계 바깥에 있는 기쁨이었을 테고, 그는 그 기쁨을 외면하지 않았다. 익숙한 세계에 머물렀다면 안전했겠지만, 그 안전 안에서는 끝내 닿을 수 없는 소리가 있었을 것이다.

 


 

월턴, 교향곡 제1번 Walton, Symphony No. 1 in B-flat minor


 

 

 

1931년, 당시 20대 후반이던 윌리엄 월턴은 실로 상쾌하게 경력을 쌓아 나가고 있었다. 1929년에는 장르의 대표작으로 자리 잡은 비올라 협주곡을 발표했고, 이후 곧바로 또 하나의 걸작인 오라토리오 <벨사살(벨사자르) 의 향연>을 완성했다. 작곡가는 지금까지 해 오던 대로만 하면, 막 시작한 교향곡도 문제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교향곡이 첫선을 보인 것은 착수 이후 3년이 지난 1934년 12월 3일이었는데, 해밀턴 하티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이날 교향곡을 3악장까지만 연주하며 작곡가가 마지막 악장 완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알렸다.

 

그사이 영화 <이스케이프 미 네버 Escape Me Never>1935 에 작곡으로 참여하며 한동안 교향곡에서 멀어졌던 월턴은 이후 미완성이었던 4악장으로 돌아와 작업을 마무리했고, 1935년 11월 6일, 하티가 지휘하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완전한 초연이 이루어졌다.

 

실로 다행히 이 작품은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보상하는 듯한 높은 완성도로 청중을 만날 수 있었다. 탄력 있는 리듬, 관악기의 음색, 주된 선율의 분위기에서 장 시벨리우스의 영향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한편, 주제를 전개하는 방식에서는 베토벤과도 닮은 교향곡은 월턴이라는 작곡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수작으로 자리 잡게 된다.

 

글 윤무진

(월간 SPO 편집위원· 음악 칼럼니스트)

 

 

끝내지 못한 마음도 나를 앞으로 데려갈 수 있을까?


모든 창작의 원동력이 나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하나에서만 도출된 거라면 얼마나 좋겠냐만, ‘마감’이라는 단어 하나에도 꽤 많은 일이 벌어짐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할 수나 있을까?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말을 주절거릴 시간조차 없으면, 그냥 일단 뭔가를 내놓게 되는 것. 누군가 이걸 어떻게 했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게 벙쪄버릴 때가 있다. 대단한 변명거리라도 만들어두지 않으면, 결국 아하하... 웃고만 말게 된다.


늘 완성된 상태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내 준비된 모습이면, 언제든 달려 나갈 수 있게 스탠바이 상태라면. 이를테면 가만히 있다가도 작은 사건 하나에 갖가지 영감을 떠올리고 마는, 꽤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질 텐데. 하지만 상상 이상으로 나태하고, 생각 이상으로 변수에 취약한 경우가 대다수인 것을 보면 그냥 이러고 사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아 보인다.


다만 이를 안다고 해서, 머릿속 안에 있는 나보다 유달리 자주 뒤처지는 현실의 나를 마주했을 때 속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뭐가 됐든 앞서 나가면 좋은 일이 아니던가? 기준선이란 게 어디 있겠냐만은, 딱 빨간펜 하나를 바닥에 그어놓고 나랑 같이 있을 것 같은 사람이 나보다 조금이라도 앞쪽으로 향할 기미를 보이면 순식간에 중심점이 흔들린다.


불안은 우리를 망쳐버릴까, 아니면 움직이게 하는가?


이리 연약해서 어찌할까? 작은 일에도 정신머리가 뒤숭숭해지면 어떡하나? 힘들어한다고 해서 누가 내일을 대신해줄 것도 아닌데. 피할 구멍이 없다는 것. 도망갈 뒷문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 사실만 생각해도 붉어진 눈자위를 박박 비빈 채 두 뺨을 양손으로 내려치게 된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뭐든 써내야만 한다! 시간에 양발이 달궈지기 전에 무슨 일이든 저질러야만 한다! 월턴의 교향곡이 마지막 악장을 갖추지 못한 채 세 악장만 먼저 연주되던 그날, 혹은 그 전날.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끝마치지 못한 선율과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세상에서 발버둥 쳐야 했던 그는 어떻게 그 고난을 견디려 했을까?

 

해가 떠오를 때까지, 저물어들 때까지, 내일이 오기 전까지. 수없이 미루고 미뤄도, 시간을 내어주어도, 마지막 악장이 찾아오지 않았다면? 끝끝내 보이는 것이 없다면. 속절없이 망쳐질 것인가. 뛰어넘을 것인가?

 

당장 의자에서 박차고 일어나야 할까나.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야 할까. 바닥에 얼굴을 붙이고 온몸을 가라앉혀 놓을까. 숨이 가빠질 만큼 뜀박질을 해야 할까. 바라는 미래와 조금이라도 인사를 하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 그라면 어떻게 했을까. 맺어지지 못한 선율은 잊지 못할 선율이 되었을까. 끝내 잊혀버릴 바람 안에 있을까. 잊어야 할 이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그라면 어찌했을까.


삶의 가장 큰 구름은 어디에 있을까?


광활하면 광활한 대로 반갑고, 피어나면 피어난 대로 어여쁘다. 태어나기 위해 태어난 것들이니 어찌 모난 구석이 있을까? 삐죽하면 삐죽한 대로 받아들이려 했는데, 어찌 이리 온순할까? 의미심장하기보다, 거대한 진동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약간의 앞일 정도만을 받아들이고 사는 정도의 부드러움을 품고 있다.


꽤 멋져 보이려 하지 않는다. 제가 향하고자 하는 길을 잘 알고 있다는 것. 울상인 채로 오래 머뭇거릴 바에야 할 수 있는 만큼, 제 성의를 다 보이는 만큼 해내보겠다는 것. 작은 틈에서도 흘러나오는 일상의 재미를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상상하지도 못한 구름 하나가 품 안에 놓이지 않을까? 어쩌면 구름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창한 완성은 아니어도,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게 하는 작은 것.


미완의 시간이 있든 없든, 불안이 나를 망치든 움직이게 하든, 삶은 그 둘 중 하나의 결론을 매번 골라주지 않는다. 완성된 마음으로만 무대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무너진 마음으로만 주저앉는 것도 아니다. 덜 완성된 채로 밥을 먹고, 덜 준비된 채로 문장을 쓰고, 조금 불안한 채로 약속된 시간 앞에 선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 아니 그런가?


브람스가 손에 익은 세계 밖의 기쁨을 외면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월턴은 끝내 다 갖추지 못한 시간까지 끌고 간 사람이다. 하나는 시작의 낯섦이고, 다른 하나는 계속의 불안이다.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표정으로 묻는다. 우리는 완전히 알아서 시작하는가. 완전히 준비되어서 계속하는가.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떤 마음은 익숙한 세계 밖에서 먼저 자라나고, 어떤 삶은 덜 완성된 채로도 약속된 시간 앞에 선다. 그러니 5월의 이 공연은 완벽하게 준비된 마음보다, 그럼에도 나아가는 마음에 조금 더 가까운 밤이 될지 모른다. 그런데 어쩌나. 기쁨은 자꾸 바깥에 있으니, 결국 그쪽을 바라봐야지.

 

 

0528-29_포스터.jpg

 

 

2026 서울시향 마르쿠스 슈텐츠와 바딤 글루즈만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지휘자 마르쿠스 슈텐츠, 바이올리니스트 바딤 글루즈만과 함께 〈2026 서울시향 마르쿠스 슈텐츠와 바딤 글루즈만〉을 선보인다. 공연은 2026년 5월 28일 목요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5월 29일 금요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다. 이번 무대에서는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와 월턴의 교향곡 제1번이 연주된다.


[프로그램]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Brahms, Violin Concerto in D major, Op. 77

 

월턴, 교향곡 제1번

Walton, Symphony No. 1 in B-flat minor


 

장유진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클래식이랑 서서히 친해지는 중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