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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음악의 힘을 믿으시나요 - 뮤지컬 펑크 [공연]

펑크의 언어로 전달하는 낡고 순수한 이야기

by 임지우 에디터
2026.05.20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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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음악은 시대의 정상성이 되고, 어떤 음악은 소음이나 일탈로 취급된다. 오버그라운드는 단순히 유명한 음악의 세계가 아니라, 자본과 미디어가 승인한 감각의 영역에 가깝다. 반대로 언더그라운드는 아직 시민사회의 승인, 혹은 자발적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한 취향과 태도가 머무는 공간이다. 흥미로운 건, 대부분의 새로운 문화는 언제나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펑크는 그 과정이 얼마나 성공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펑크 록(Punk Rock)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고정관념이 따라붙는다. 시끄럽고 난폭한 음악, 사회를 향한 분노, 비주류 청춘들의 과격한 문화. 누군가에게 펑크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소음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지나간 시대의 반항 정신쯤으로 소비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대중문화는 펑크가 남긴 유산 위에서 굴러간다. 우리는 이미 펑크의 언어 속에 살고 있다.


펑크는 처음부터 단순한 음악 장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음악 산업과 사회 질서 전반에 대한 일종의 태도 선언이었다. 1950년대 중반 엘비스 프레슬리로 대표되는 로커빌리 음악이 주류로 떠오르면서부터, 40여 년간 록은 음악 산업에서 가장 거대한 무언가였다. 지금의 팝 시장이 그러하듯, 자본의 향기가 느껴지는 ‘비싼 소리’들과 스타 시스템 속에서 록은 점점 일부 선택받은 사람들의 영역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런 오버그라운드가 있다면, 언더그라운드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기술보다 태도, 완성도보다 에너지, 순응보다 저항을 앞세운 펑크는 기존 음악 산업이 규정하던 ’좋은 음악’의 기준 자체를 부정했다. 서툴러도 상관없다, 배운 적 없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지금 당장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라는 식의 급진적인 선언이었다.


하지만 역설은 그 다음에 발생한다. 비주류였던 펑크는 시간이 지나 대중문화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한때 위험하고 불온하다고 여겨졌던 미학은 이제 패션 브랜드의 런웨이에 오르고, '포 코드(Four Chords)' 진행으로 대표되는 직선적인 사운드는 팝 음악 안에서도 사용된다. 솔직한 감정을 날것 그대로 드러내는 가사, 권위와 시스템에 대한 냉소, 장르의 경계를 무시하는 태도 역시 모두 펑크의 문법에 가깝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것을 “펑크”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지금은 너무 익숙해진 DIY(Do it Yourself) 정신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언더그라운드였던 문화가 오버그라운드의 일부가 되는 순간이다.


안토니오 그람시에 따르면 헤게모니는 대항문화를 완전히 제거하기보다, 그것을 흡수하고 재해석하면서 스스로를 갱신한다. 즉, 펑크는 기존 질서를 공격했지만 동시에 주류문화의 일부가 됨으로써 새로운 헤게모니 안에 편입된 셈이다. 한때 체제 밖의 문화였지만, 지금의 대중음악과 패션 등의 문화 생태계는 모두 펑크의 영향을 받은 채 움직인다. 직접 만들고, 촬영하고, 편집하고, 업로드하는 오늘날의 창작 문화는 어쩌면 펑크가 가장 먼저 꿈꾸었던 세계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이처럼 우리는 여전히 펑크의 언어를 소비하며, 그것을 더 이상 낯설게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펑크의 언어로 희망을 노래하는, 창작 뮤지컬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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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펑크>는 제목에서 내비치는 이미지와 실제 작품 사이의 간극이 흥미로운 뮤지컬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펑크’라는 단어의 첫인상은 대개 거칠고 반사회적인 에너지다. 그러나 이 작품이 택하는 방향은 따뜻하고, 때론 오그라들며, 순수하다. 디스토피아 세계관과 이름 대신 숫자로 불려지는 ‘클론’이라는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결국 <펑크>가 이야기하는 것은 “오직 음악만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는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믿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메시지는 자칫 진부하거나 청춘만화적인 감상성으로 보일 위험 역시 안고 있다. 실제로 극을 이끌어가는 대사와 정서는 낯간지러움을 감수해야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펑크>의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그 ‘오그라들 정도의 순수함’을 숨기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작품은 음악을 거창한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기보다,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가장 원초적인 감각으로 다룬다. 갈수록 냉소적으로 변해가는 시대에, 예술의 힘을 진심으로 믿는 태도 자체가 오히려 귀하게 다가오지 않는가.


무대 위 네 명의 배우가 구현하는 밴드 서사는 그래서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드럼, 베이스, 기타, 보컬로 이어지는 구성은 단순한 설정적 장치에 머물지 않는다. 배우들은 실제 밴드의 합주와 다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악기 싱크와 디테일을 보여준다. 특히 운지와 리듬 타이밍 같은 세부 동작들이 MR과 거의 이질감 없이 맞물리는데, 이는 단순한 흉내 이상의 연습량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악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눈길을 끌만한 화려한 디자인의 펜더 사의 스트라토캐스터 기타와, 무대 구석에 빨갛게 전원이 켜져 있는 앰프까지. 덕분에 관객은 ‘배우가 밴드를 연기하는 장면’을 보는 대신, 실제로 음악을 통해 연결되는 네 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뮤지컬에서 밴드 장면이 종종 형식적인 볼거리로 소비되는 것과 비교하면, 밴드의 질감 자체를 성실하게 구현한 연출진과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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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작품이 펑크를 해석, 또는 차용하는 방식이다. <펑크>는 펑크를 장르적 상징으로 재현하기보다, 아직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펑크는 공격성과 저항의 미학으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누구나 음악을 할 수 있다”는 DIY 정신과 자기표현의 문화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펑크>는 펑크의 사회비판적 얼굴보다도, 음악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순수한 충동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어떤 관객에게는 이러한 접근이 다소 귀엽고 안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특히 섹스 피스톨즈의 그것을 기대했던 누군가라면 실망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미 펑크의 이미지와 언어가 대중문화 속에서 널리 소비되고 있는 현재, 오히려 이 작품처럼 한국 대중 정서 안에서 펑크를 재번역하는 시도 역시 충분히 의미 있어 보인다.


실제로 공연장 안의 분위기 역시 그런 작품의 정서를 증명하는 듯 보인다. 작품을 찾는 재관람객의 비율이 높고, 커튼콜에서는 자연스럽게 싱어롱이 이어진다. 물론 이는 배우 개인의 매력이나 탄탄한 캐스팅 라인업에서 비롯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단순한 팬덤적 소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에게서 작품이 전달하는 감정의 결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인상이 분명 존재했다. 음악을 매개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다는 작품 메시지가 객석 바깥의 풍경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은, 음악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아주 보기 좋은 풍경이었다.


<펑크>가 보여주는 흥행의 의미 역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냉소와 거리두기가 익숙한 시대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음악이 자신을 조금은 더 인간답게 만들어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반응한다. 그리고 그런 작품이 대학로 한복판에서 꾸준히 관객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은, 예술의 힘을 믿고 싶은 마음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결국 이 작품은, 끝내 인간사회에 대한 낙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낡고 순진한 이야기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음악이 인간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그 단순한 문장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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