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동안 예술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평가받아 왔다.
정교한 연출, 안정적인 서사, 완성도 높은 장면들. 많은 작품들은 관객을 몰입시키고 위로하며, 잠시 현실 밖으로 데려가는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어떤 시대에는, 혹은 상황에는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지금의 예술은 아름다움 이전에, 현실을 얼마나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함께 요구받고 있다.
뮤지컬 [펑크]는 그런 흐름 위에 놓인 작품처럼 보였다. 이 작품은 매끄럽게 정리된 감정 대신, 흔들리고 부딪히는 감정들을 그대로 무대 위에 올려둔다. ('펑크'라는 제목과도 다소 맞닿는 지점이다.)
인물들은 쉽게 이해되거나 설명되지 않고, 장면들은 때때로 거칠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작품의 태도를 분명하게 만든다. 보기 좋게 다듬는 것보다, 지금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펑크라는 문화 역시 본래 그런 성격을 지녔다. 완벽한 연주나 세련된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왜 지금 이런 목소리를 내야 하는가에 대한 절박함이었다.
기존의 질서와 권위, 익숙한 기준들에 균열을 내기 위한 움직임에 가까웠다. [펑크]는 단순히 음악 장르를 차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태도 자체를 무대 위로 가져오려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작품이 쉽게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최근의 콘텐츠들은 대부분 결국 괜찮아질 것이라는 결론으로 향한다. 물론 그런 위로는 필요하지만, 현실의 불안과 소외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시대에는 섣부른 봉합보다 오래 남는 감정과 상황들이 존재한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펑크]는 그것들을 억지로 정리하지 않는다. 대신 불안과 분노, 혼란의 감각을 끝까지 붙들고 간다.
그래서 공연이 끝난 뒤 가장 오래 남았던 것은 특정 장면이나 넘버보다도, 오늘날 무대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어지러운 세상을 음악으로 바꾸어 보려던 작품의 줄거리처럼, 이제 작품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결과물에 머물기보다, 동시대의 균열을 감각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하다. 동시에 그래야만 한다. 누군가를 완전히 편안하게 만드는 작품보다, 한 사람의 감정을 흔들고 오래 남는 작품들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이니 말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펑크]는 결코 편안하고 친절한 공연은 아니다. 세상의 불합리한 면을 내찌름과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불친절하고, 거칠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공연이다. 그러나 그 소음은 단순한 반항이라기보다, 끝내 존재를 증명하려는 목소리에 가깝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태도,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지금의 시대를 드러내려는 움직임. 작품은 그것들을 무대 위에서 집요하게 밀어붙인다.
조명이 모두 꺼진 뒤에도 몇 장면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것은 아름다운 장면이라서라기보다, 지금 시대의 감각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의 예술은 더 이상 조용하고 단정한 형태만으로 남지 않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거칠고 불완전하더라도, 현실의 균열을 통과하며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펑크]는 그러한 가능성을, 그리고 그러한 예술의 형태를 즐거운 형태로, 선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